화북선무단 ()

현대사
단체
1945년 일제 패망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외교 기구로서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 산하 기구로서 중국 화북 지방 거주 한인들의 생명, 재산 보호 및 안전 귀국을 주선했던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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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5년 일제 패망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외교 기구로서 설치된 대한민국임시정부주화대표단(大韓民國臨時政府駐華代表團) 산하 기구로서 중국 화북 지방 거주 한인들의 생명, 재산 보호 및 안전 귀국을 주선했던 단체.
설립목적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접한 임시정부는 중국 내 한인 동포들의 구제와 보호, 이들의 귀국 문제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투입된 한적 사병들의 한국광복군으로의 편입 등의 문제를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11월 1일 임시정부는 중국과의 외교와 한인 사무 처리를 위해 외교기관인 주화대표단을 설치했다.

주화대표단은 주로 한인 사무를 관리하는 한교선무단과 군사를 처리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나뉘어 운영되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조사·구제하기 위하여 화북·화중·화남에 선무단을 파견하여 선무 사업을 진행했다. 화북선무단은 1945년 11월 중순 북경에 설치되었으며, 주화대표단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다.

기능과 역할

화북선무단 단장에는 이광(李光)이 임명되었으며, 교무·구호·군무의 3개 부서가 설치되어 업무를 수행하였다. 화북선무단은 북경·천진뿐만 아니라 화북 지방 등지의 한인에 관한 업무를 처리했다. 임시정부가 반포한 한교선무단복무조례의 제5조·제6조에 의하면 화북선무단은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의 지도와 감독을 받고 중국 정부의 협조 하에 작업을 진행하며, 수시로 중국 지방 당국과 협력 및 연락을 취했다. 화북선무단은 본부를 북경에 두고 산하에 석문분단·천진분단·석가장분단 등을 설치하여 각지 한인 관련 업무를 처리했다.

화북선무단은 난립한 한인 단체의 통합에 착수했다. 북경 한인 각 단체 대표 및 한인 사회의 유지들을 소집하여 협상한 결과 각 단체가 스스로 해체하고 주화대표단의 지도하에 새로운 통일 기구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에 화북선무단 단장 이광은 성격을 달리하여 난립한 20여 개의 한인 단체들을 해산 통합하여 한국교민회·한국청년단·애국부인회 등으로 재편시켰다.

화북선무단은 1945년 12월 12일 개명희원(開明戱院)에서 북경 11구의 한인 대표를 소집하고, 북경 당국 각 기관 장관의 참석 하에 전체 한인 통일 기구인 북평한국교민회(北平韓國僑民會)를 조직하였다. 북평한국교민회는 교포 단결과 복리 증진을 목적으로 규정하고 회의에서 회칙을 제정하며 회칙에 따라 임원을 선출했다.

화북선무단은 한국교민회가 성립된 후 1946년 1월부터 제11전구장관사령부·북평행영·사회국·경찰국·북평시당부 등 북경 당국 각 기관에 한국교민회의 조직 회칙 및 명부를 보내 허가를 신청했다. 한국교민회는 회칙에 따라 북경 재류 한인으로 구성되고, 북경시 각 구에 분회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화북선무단의 지휘를 받아 한인의 상황을 조사·보고하고 한인 구제와 귀환 등의 업무를 처리했다.

화북선무단은 해방 직후 난립했던 북경 지역 한인 단체들을 해체하고 재편성함으로써 북경 한인 사회는 점차 정립되어 갔다. 그러나 한국교민회의 업무 처리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존재하였으며, 심지어 간부들이 총사직하는 사태까지 확대되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임시정부와 화북선무단의 귀환 한인 명부의 작성 문제와 재정적인 문제로 보여진다. 또한 한국교민회에 대한 임시정부와 화북선무단의 무리한 조치도 한몫을 했다. 그 결과 화북선무단과 한국교민회 사이에 모순과 갈등이 생겼고, 이에 북경 한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데 상당한 한계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화북선무단은 광복 직후 임시정부를 대신하여 중국 정부와 협의하여 화북 지방 한인 교포들의 생명 및 재산을 보호하고 이들을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왔던 한적 사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광복군을 확대하는 방면에서도 큰 공헌을 하였다.

참고문헌

『자료한국독립운동』 1(추헌수,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2)
『근대 북경의 한인사회와 민족운동』(손염홍, 역사공간, 2011)
집필자
김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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