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고려기는 641년에 고구려의 사신으로 파견된 당나라의 진대덕이 귀국 후 고구려의 정치·사회·풍속·지리 등을 상세하게 저술한 책이다. 진대덕은 당 태종의 명으로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약 한 달 동안 고구려에 있는 중국인을 만나는 등 고구려의 정세와 지리를 포함한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진대덕은 귀국 후 태종에게 사행의 결과를 보고할 목적으로 수집한 정보들을 정리해 고구려의 국제정세인식과 대외정책 등을 서술했다. 이 책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한원』과 『태평환우기』에 『고려기』라는 이름으로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641년 당(唐)의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다녀온 이후 저술하였다. 현재 『봉사고려기(奉使高麗記)』는 전하지 않지만 『한원(翰苑)』 「번이부(蕃夷部)」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등에 그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구당서』 「경적지(經籍志)」와 『신당서』 「예문지(藝文志)」에 서명(書名)이 확인된다. 『구당서』 「경적지」와 『신당서』 「예문지」에는 고구려와 관련한 2편의 저술이 나오는데, 하나는 배구(裵矩)의 『고려풍속(高麗風俗)』이고 다른 하나가 『봉사고려기』이다. 『구당서』 「경적지」와 『신당서』 「예문지」에 『봉사고려기』의 찬자는 적혀 있지 않다. 다만 일반적으로 당 태종대 진대덕의 저술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641년 7월 당 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진대덕은 641년 8월에 귀국하였는데, 귀국 직후 당 태종에게 고구려 사행의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고구려에 거주하던 중국인을 만났다고 하였고, 고구려의 국제정세 인식과 대외정책이 어떠하였는지 진술했다. 이와 함께 고구려의 경계에서부터 각 성읍(城邑)의 산천풍속(山川風俗)을 파악하고 왔다고 하였다. 직방낭중은 병부 소속의 종5품상 관직으로 천하(天下)의 지도(地圖)를 관장하고, 당과 변경 각지의 대외관계를 담당했다. 진대덕은 직방낭중이란 직임에 맞게 고구려의 정세와 지리를 포함한 각종 정보를 수집 ·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봉사고려기』는 진대덕의 저술로, ‘641년 고구려 사행 보고서’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원』 「번이부」와 『태평환우기』 등에는 『고려기(高麗記)』가 인용되어 있는데, 이때 『고려기』란 일반적으로 『봉사고려기』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고 있다. 『한원』 「번이부」에 『고려기』를 인용한 내용이 풍부하다.
『한원』은 660년 무렵 당의 장초금(張楚金)이 찬술한 유서(類書)의 일종이다. 본래 30권 분량이었지만, 지금은 마지막 권으로 여겨지는 번이부 1권의 필사본만이 전한다. 필사본은 일본 후쿠오카현[福岡縣] 다자이후 텐만구[太宰府天滿宮]에 소장되어 있다.
『한원』 「번이부」는 정문(正文)과 주문(注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은 사륙변려체(四六騈儷體)의 함축적인 문장이고, 주문은 정문의 전거를 밝힌 것으로, 각종 문헌을 인용하여 정문의 이해를 돕고 있다. 『고려기』는 주문에 인용되어 있다.
『한원』 「번이부」에 인용된 『고려기』에는 고구려의 관제(官制)를 비롯하여 정치⋅사회⋅풍속, 지리 및 그와 관련된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그와 관련하여 참고되는 것이 『구당서』 · 『신당서』「고려전」이다. 이들 사료를 비교해 보면, 내용과 문장에 유사점이 상당하다. 따라서 『봉사고려기』는 『구당서』 · 『신당서』 「고려전」 찬술의 중요한 전거자료였다고 파악된다.
『한원』 「번이부」에 인용된 『고려기』, 『구당서』 · 『신당서』「고려전」과 같이 7세기 고구려와 관련한 고문헌, 사서 찬술의 시점과 배경을 말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