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석문전투는 672년 신라와 당이 석문에서 벌인 전투이다. 670년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이 요동의 오골성을 공격하자 당군 4만 명이 평양에 진영을 구축하고 황해도로 남하하였다. 당군이 한시성과 마읍성을 점령하고 남하하자 신라군은 달아나는 당군을 석문(황해도 서흥군 서흥면)까지 쫓아가 싸웠는데 크게 패하였다. 석문전투에서 패배한 신라는 당나라에 사죄사를 파견하고 신라가 억류하고 있던 당군과 웅진도독부 관련자를 돌려 보냈다. 또한 신라는 방어로 전략을 전환하고, 국원성과 북형산성 등 대대적인 축성을 통해 당군의 침입을 축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체계를 수립하였다.
정의
672년 신라와 당이 석문(石門)에서 벌인 전투.
개설
역사적 배경
경과
결과
한편으로 신라는 전략을 방어로 전환시키고,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하였다. 672년에 주장성(晝長城: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지금의 남한산성 모태가 됨)을 쌓았고, 673년 2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고, 8월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이어 9월에 국원성(國原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주양성(走壤城), 주잠성(主岑城),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신라는 대규모 축성을 통해 당군의 침입을 축차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방어체계를 수립하였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나당전쟁 연구』(이상훈, 주류성, 2012)
- 『나당전쟁사 연구』(서영교, 아세아문화사, 2006)
- 『나당전쟁사』(서인한, 국방군사편찬연구소, 1999)
- 「나당전쟁기 신라의 대규모 축성과 그 의미」(이상훈, 『한국고대사탐구』 23, 2016)
- 「나당전쟁기 석문전투」(서영교, 『동국사학』 38,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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