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 진흥왕 당시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곽. 산성.
개설
대야성의 평면 형태는 해발 50∼60m의 능선을 기준으로 자연 지세에 따라 북서-남동 방향으로 길게 부정형으로 축조되었다. 서쪽은 황강에 연해 있는 급경사 단애지역으로 자연성벽을 이루고 있고, 남·동·북쪽으로는 능선을 따라 성벽이 축조되었다. 성의 둘레는 인접한 충혼탑 구역까지 2,000m 내외로 추정된다. 성의 북쪽을 제외한 삼면으로는 황강이 흐르고 있어 자연적인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남서쪽으로는 천연단애절벽이 형성되어 있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성내 정상부에서는 고령·대구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와 삼가·진주 방면 도로, 대병·거창 방면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동쪽으로는 황강을 따라 초계방면을 조망할 수 있다. 1993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대야성이 다시 등장하게 된 시기는 신라 후기로,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의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927년 후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대야성을 고려가 함락시키고 파괴한 이후 군사거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면서 이때 완전히 폐성(廢城)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대야성의 체성부는 대부분 훼손되어 성벽의 축조수법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다만 동쪽과 남쪽에 양호하게 남은 성벽이 일부 있고, 동북쪽은 대부분 붕괴되어 잔존 1~2단의 기단석이 남아 있다. 체성부의 잔존 높이는 1.5m 내외, 폭은 2.5m 내외이다. 시굴조사에서 확인된 체성부의 높이를 추정하면 약 4m 정도이다.
시굴조사 결과 문지와 배수시설로 추정되는 석축시설이 확인되었고, 체성부의 경우는 기단부만 1∼2단 정도 남아 있으며 내벽 쪽으로 70㎝ 내외로 적석되었다. 배수시설은 주먹크기의 할석과 자갈이 깔려 있으며, 그 주변에 건물지로 추정되는 석열이 확인되었다. 또한 성 내부에서는 용도미상의 적석군과 주거지, 수혈들이 조사되었다. 건물지는 서쪽 구릉 8~9부 능선상의 평탄면에서 확인되었는데, 기단석축이나 배수로 및 소토의 흔적 등으로 미루어 성내 군사들의 주둔과 관계되는 시설로 판단된다. 또한 고분군은 체성부 외부 해발 60~70m 선상에서 확인되었으며, 수혈식석곽묘와 횡구식석실묘로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동국통감(東國通鑑)』
- 『합천 대야성: 정비·복원을 위한 학술조사』(동양문물연구원, 2011)
-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봉수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 『합천 대야성지 3차 시굴조사 약보고서』(동양문물연구원, 2009)
- 『대야성: 대야성 고증을 위한 1·2차 시굴조사 보고서』(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2005)
-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신라의 전쟁과 대야성」(김창석, 『신라문화』 34, 2009)
- 「합천 대야성의 고고학적 검토」(이일갑, 『한국성곽학보』 9, 2006)
- 「신라 선덕왕대 대야성 함락의 의미」(김덕원, 『동봉신천식교수정년기념사학논총』,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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