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신금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집터 · 구 · 수혈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 생활유적.
목차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집터 · 구 · 수혈 등이 발굴된 유물산포지. 생활유적.
내용

해남신금유적은 해발 200m인 서쪽 구릉의 동쪽 말단부 신금마을 일원에 있다. 유적은 해발 200m 내외의 나지막한 구릉과 평야, 하천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적의 남쪽에 삼산천(三山川), 북쪽에 남천이 서쪽으로 흘러 고천암호로 유입된다. 유적은 삼산-해남간 도로확장 및 포장공사로 인하여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2002년 12월 9일부터 2003년 9월 6일까지 실시하였다. 유구는 해발 17~27m 사이 구릉사면에서 확인된다. 발굴조사 결과 주거지 72동, 구(溝) 9기, 수혈(竪穴) 19기가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4개의 군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릉 전면에 고른 분포양상을 보이나 동쪽에서 가장 밀집도가 떨어진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으로 대부분 등고선과 평행한다. 내부시설로는 벽구(壁溝), 배출구(排出溝), 벽체, 부뚜막, 외부구(外部溝)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면적은 8㎡ 미만의 소형, 8~56㎡ 미만의 중형, 56㎡ 이상의 대형으로 나누어진다. 소형은 4동, 중형은 41동, 대형은 2동으로 중형의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난다.

기둥배치는 4주식(柱式)이 60동, 무주식이 12동이다. 벽구는 네 벽면 전체에 시설되어 배출구와 연결되는 경우, 일부 벽면에 시설되며 배출구와 연결되는 경우, 벽면에만 시설되고 배출구가 없는 경우로 나누어진다. 벽구가 시설된 46동 가운데 29동이 벽면 전체에 돌렸고 배출구와 연결된다. 벽체는 목재와 점토를 사용하여 쌓아 올렸다. 부뚜막은 대부분 북벽과 서벽 중앙에 설치하였다. 아궁이의 형태는 반원형, 방형 등이다. 외부구는 주거지 외부에 둘렀다. 외부구의 기능은 경사도가 비교적 급한 구릉 사면에 입지하는 점을 통해 볼 때, 배수(排水) 혹은 방수(防水)의 기능에 적합한 것으로 판단된다. 구는 대부분 주거지 주변에서 확인되므로 외부구이거나 주거지와 관련된 시설로 판단된다. 신금유적 외에도 외부구가 설치된 유적은 부안 동리유적, 담양 성산리유적, 함평 월산리유적, 함평 만가촌유적 등이 있다.

유물은 호형토기(壺形土器),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발형토기(鉢形土器), 증(甑), 옹형토기(甕形土器), 이중구연토기(二重口緣土器), 주구토기(注口土器), 유공광구소호(有孔廣口小壺), 고배(高杯), 경배(頸杯), 파수부토기(把手附土器), 방추차 등 토기류와 함께 갈돌, 미완성 석기, 공이, 숫돌, 갈판 등의 석기류, 철부, 철겸, 도자, 부형철기(斧形鐵器) 등의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수혈유구는 주거지 주변에서 확인된다. 평면형태는 원형, 타원형, 부정형이며, 규모는 대부분 소형이고 바닥면이 일정하지 않다. 내부시설은 주공과 부정형 구덩이 등이 확인된다. 출토유물은 완형이 없으며 대부분 토기 편이다. 또한 5, 10, 16, 17호 수혈은 점토와 소토, 목탄 등이 혼재되어 있어 화재로 인한 폐기도 확인된다.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 18호 주거지는 490년, 19호 주거지는 310년, 28호 주거지는 300년, 40호 주거지는 390년, 50호 주거지는 190년, 51호 주거지는 160년, 57호 주거지는 190년 또는 310년, 59호 주거지는 190년, 69호 주거지는 120년으로 나왔다. 고고지자기 연대는 18호 500±30년 또는 35±25년, 67호 410±10년 또는 1370±10년 또는 110±10년, 60호 1825±30년 또는 90±10년 또는 440±15년, 63호 390±25년, 1350±25년, 125±20년, 55호 105±30년 또는 1120±70년 또는 430±40년으로 측정되었다. 대체로 기원후 3세기 중반에 형성되었으며 이후 5세기를 전후한 시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거지에서 출토된 곡물은 벼와 콩이고 수종은 참나무, 상수리나무가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해남신금유적은 그동안 묘제 중심으로만 논의되었던 해남반도의 고대 주거문화를 밝힌 첫 번째 조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해남신금유적 축조세력은 삼산천과 인근 해안을 배경으로 성장한 집단이다. 삼산천 일원은 신금고분(新今古墳), 시등고분군(市燈古墳群), 농암고분군(濃岩古墳群) 등의 옹관고분에서부터 용두리고분(龍頭里古墳) 등 전방후원형고분(前方後圓形古墳)까지 다양한 분묘유적이 분포한다. 이와 함께 10여 개소 이상의 생활유적이 알려져 있어 삼산천 수계를 중심으로 성장한 고대 지역정치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리고 3세기대로 편년되는 승문계타날문토기(繩文系打捺文土器)가 확인되어 해남신금유적과 주변지역간의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참고문헌

『해남 신금유적』(이영철 외, 호남문화재연구원, 2005)
집필자
권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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