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량(汝亮), 여량(汝良)
시호
문헌(文憲)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88년(정조 12)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진주(晉州)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형조판서|대사헌|예조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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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여량(汝亮, 汝良).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의 8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강세정(姜世靖)이고, 아버지는 강준흠(姜浚欽), 어머니는 권빈(權儐)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19년(순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 · 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헌종실록(憲宗實錄)』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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