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섭서(葉西). 권옹(權顒)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권엄(權弇)이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권밀(權謐)이며, 어머니는 유춘영(柳春榮)의 딸이다.
1765년(영조 4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773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과거를 빈번히 실시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가 추자도(楸子島)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81년(정조 5)에 헌납(獻納)이 되고 1790년 충청도관찰사 · 대사간 · 공조판서 · 형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한때, 강계부사 · 전라도관찰사, 1795년 강화부유수 등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병조판서로 기용되었다. 1801년(순조 1)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있을 때 이가환(李家煥) · 이승훈(李承薰) · 정약용(丁若鏞) 등 천주교신자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였다.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왕의 총애를 받던 태의(太醫) 강명길(康命吉)이 민가 수십호를 옮기는 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송사(訟事)를 일으켰으나 끝내 가난한 백성들을 옮기게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