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은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을 가르는 우주론적 시간의 일대 전환점이며, 동시에 인간이 선천에서 경험한 온갖 고통과 혼돈을 극복하고, 다가올 후천에서 신선선경(神仙仙境)의 이상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 우주론적 시간관이 표현된 사상이다.한국민족종교인 동학과 천도교, 김일부의 사상, 증산교, 원불교 등에 대표적으로 나타난다.
한국종교사에 나타나는 우주론적 미래대망사상으로는 불교의 미륵사상(彌勒思想), 기독교의 종말사상(終末思想) 그리고 개벽사상을 포함하여 몇 가지 형태가 있다. 그 가운데 개벽사상은 한국에서 자생한 신종교의 핵심사상으로 발전하여 19세기 이후 한국민족종교운동의 일대 특성을 이루는 사상적 요인이 되었다.
개벽의 문자적 의미는 새롭게 연다는 뜻이다. 중국 한대(漢代)의『회남자(淮南子)』와 삼국(三國)시대의『삼오역기(三五歷記)』 등에 기록된 고대 중국신화에 따르면, 개벽은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세상의 시작이라는 일대 우주론적 사건은 당연히 그 전과 후로 구분되게 마련이다. 이 일대사건 이전을 ‘선천’이라 하고, 이후를 ‘후천’이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주역(周易)』의 문왕역(文王易)은 후천이 되고, 그 전의 복희역(伏犧易)은 선천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개벽은 우주론적인 차원의 일대 전환적 사건으로 태평성세의 이상세계가 도래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개벽은 음양오행과 역을 포함한 상수사상(常數思想:정해진 운명사상)으로 해석되면서 동양의 전통적인 운세관(運世觀)을 이루게 된다. 시운의 변화에 따른 왕조와 사회의 변동을 담고 있는 전통적인 운세관은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말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형태로 전수되다가, 조선 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조선 왕조가 망하고, 다른 성씨의 새로운 왕조가 일어선다는 참위설의 창궐을 부채질하였다. 19세기 중엽 서양 열강에 의하여 중국이 위협을 받고, 조선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운세관은 새로운 시대를 대망하는 개벽의 꿈으로 표현되었다.
19세기 중엽 이후 개벽사상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일으킨 동학을 효시로 강력한 민중종교운동으로 나타났고, 일부(一夫) 김항(金恒)이 지은 『정역(正易)』을 뒷받침하는 정교한 이론이 되었다. 이들 이론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이 펼쳐나간 대대적인 신비종교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다시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이 전개한 종교사회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수운 이후에 개벽사상은 한국 민족종교운동의 맥을 잇는 근거가 되었으며, 오늘날 모든 한국민족종교운동의 공통점을 이룬다.
수운은 『용담유사(龍潭遺詞)』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한울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는데, 1860년(庚申) 4월 5일(양력 5월 25일)에 자신이 경험했던 신비체험의 내용을 말한 것이다. 세상이 개창된 지난번 개벽이 이미 5만년이 지났고, 이제 무극대도가 열리는 일대전환, 곧 새로운 개벽의 시점에 왔다는 것이다. 그 전환은 지금까지 경험한 쇠운의 시대 하원갑(下元甲)을 벗어나 앞으로 다가올 성운의 시대인 상원갑(上元甲)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1860년 경신년은 하원갑의 시기로 보았기 때문에, 수운은 거세게 밀려오는 서세동점의 시대적인 위기상황과 서교(西敎)라 불리던 가톨릭 교세의 팽창에 대처하기 위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다.
또한 성운의 주기와 쇠운의 주기가 윤회하면서 돌아가는 순환적 운세관에 근거하여 시간과 역사의 흐름을 해석하였다. 이러한 순환적 역사관은 아득한 과거의 요순시대를 미래의 이상사회 재현을 위한 희망의 모델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선천과 후천의 교역의 원리를 ‘무왕불복지리(無往不復之理)’, ‘순환지리(循環之理)’ 또는 ‘윤회(輪廻)같이 둘린 운수(運數)’라고 말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소강절(邵康節)이 개진했던 중국의 도서상수학(圖書常數學)의 우주론적 운세사상에 들어있는 개념들이다. 그리고 순환적 역사관 역시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동양의 전통적 역사관이다. 따라서 수운이 주창한 동학의 개벽사상은 그 안에 담긴 개념 소재들과 논리적 맥락이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상수철학(常數哲學)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의 개벽사상은 독자적인 사상적 특성을 지닌다. 그것은 중국의 상수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상적 동기이다. 수운은 『용담유사』에서 십이제국(十二諸國)이 괴질운수(怪疾運數)에 빠졌으나, ‘다시 개벽’을 맞이하여 “태평성세 다시 정해 국태민안할 것이니”라고 노래한다. 그는 현재를 괴질운수에서 이상사회로 전환하는 개벽의 시점으로 보고, 국태민안을 언제나 ‘아동방(我東方)의 보국안민’이라는 의미로 말하여,‘다시 개벽’ 이후의 후천세상의 중심은 한반도이고, 그 주역은 한민족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점은 그의 전 저술과 동학교리 전체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이러한 수운의 개벽관은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양의 전통적 상수학과 순환사관은 수운의 개벽관의 논리적 형식이라면, 그 형식에 담긴 사상적 핵심 내용은 민족애와 민족정체성의 확립에 있었다.
그는 유·불·도 삼교는 물론 산신앙이나 무속까지도 존중하면서 모든 종교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동귀일체(同歸一體)를 주장하였다. 그에 따르면, 유·불·도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가 ‘다시 개벽’을 맞이하여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데, 그 근원은 유·불·도가 아니라 오히려 ‘만고 없는’ 새로운 질서이다. 그 새로운 질서의 주역은 바로 한민족이고, 그 중심은 한반도라는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개벽관은 19세기 중엽 이후 동양권의 쇠퇴와 특히 조선이 망국의 위협을 받으면서 한국민족의 자존과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그 어떤 사상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이를 말해 준다.
그 이후 일제의 국권찬탈에 의하여 나라를 잃게 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적 개벽관은 극일(克日)의 사상적 모범으로 국민에게 널리 수용되면서 민족주의 운동의 사상적 기틀이 되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가 주동하게 된 까닭이 우연이 아니다.
동학 이후 수운의 민족주의적 개벽관의 영향을 받고 수많은 종교들이 한국에서 자생했으며, 이 종교들이 스스로 한국의 민족종교라고 부른다. 이러한 민족종교의 흐름은 곧 한국적 개벽관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수운이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종교운동으로 제창했다면, 그와 동년배였던 김일부는 개벽을 담은 운세관에 관한 정교한 재해석을 전개하였다. 일부의 재해석이 너무 새로워서 가히 ‘다시 개벽’이라 할 만하다.
일부는 주로 두 가지 면으로 그의 수도와 공부를 집중했다. 하나는 천문(天文), 역산(曆算)과 역학을 통하여 우주론적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음아어이우(吟哦唹咿吁)’의 오음(五音)을 주송하며 춤추는 영가무도(詠歌舞蹈)를 통하여 신비경험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오랜 양면적 수도생활 끝에 1881년 『주역』의 설괘(說掛)와 다른 ‘정역팔괘도(正易八卦圖)’를 환각으로 받아 그리게 되었고, 그 후 4년 뒤 그의 나이 60에 마침내 『정역』을 완성하였다.
일부는 『정역』에서 『주역』이 선천의 역인데 반하여, 『정역』은 후천의 역이라 말한다. 『주역』의 천지운행 도수(度數)는 1년이 365일과 1/4이고, 윤역(閏曆)이 있어 이를 포함하여 천지가 주기적으로 운행한다. 그러나 이러한 운행은 바르지 못하여 극한과 극서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잘못된 일월운행(日月運行)의 도수를 바로잡으면, 자연재해가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이처럼 천지운행의 도수를 바로잡은 역이 바로 『정역』이다.
『정역』에 따르면, 『주역』의 부정확성을 조정하여 1년을 360일, 1달을 30일로 바꾸어 윤(閏)을 없애기 때문에 천지가 바른 도수로 바르게 운행하게 한다. 이 때 태양계의 변화가 일어나 23.5도로 기울어진 지축이 바로 서고, 자전과 공전의 궤도변화가 일어나 황도(黃道)와 적도(赤道)가 일치함으로써 지구가 태양주위를 360일 만에 회전하게 된다. 따라서 주야(晝夜) 장단(長短)의 차이와 한서(寒暑)의 차이가 없어지고, 음양의 불평등이 사라져 화기(和氣)가 충만한 유리세계(琉璃世界)로 표현되는 이상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이른바 일월개벽사상이다. 여기에 인간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신명개벽(神明開闢)이 더불어 함께해야 한다.
이러한 정역사상은 수운이 제시한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한층 더 체계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째, 일부는 개벽의 후천운수가 도래하는 과정의 도수를 정교하게 차별화 했으며, 둘째, 후천개벽을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천지운행의 도수를 적극적으로 교정함으로써 미래의 이상사회 도래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러한 적극적인 미래참여 태도는 중국의 운세관이 지닌 숙명론과는 그 내용에 있어서 전혀 다르다. 이는 분명히 한국적 사상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김일부의 이러한 적극적인 미래참여의 태도는 증산에 의하여 한층 더 극적으로 나타난다. 증산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계룡산 남쪽 향적산(香積山) 국사봉에서 일부(一夫)를 만나 그로부터 정역사상, 곧 적극적인 미래참여 방법으로서의 도수변화 원리를 배운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인(庇人) 사람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신비로운 태을주(太乙呪)를 얻어 수도 공부를 하다가, 1901년 천지대도를 깨달아 성도(成道)하였다고 한다. 성도 후 그는 화천(化天: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천지공사(天地公事)’라는 신비로운 적극적인 미래참여의 종교행위를 하였으며, 증산 자신과 당시의 신도들이 그를 상제(上帝) 곧 하늘님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증산은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을 받아들였으나,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이끄는 동학군이 고부(古阜)에서 무참히 희생되는 모습을 보고, 후에 그의 신도들에게 무력항쟁을 금했다. 그러나 동학의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깊이 수용한 증산은 자신이 동학의 완성자이며, 천지공사가 참동학이라고 말한다. 증산은 수운과 일부의 사상을 자신의 신비주의적 맥락에서 종합하여 천지공사라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영성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증산에 따르면, 천(天)·지(地)·인(人) 삼계(三界)를 개벽하는 것이 곧 천지공사라고 한다. 삼계대권을 지닌 상제인 증산 자신이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고, 조화정부(造化政府)를 열어” 세상을 건진다고 한다. 이처럼 증산은 수운의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한층 더 강하고 적극적인 미래참여의 태도로 전환하고 있다. 나아가 증산은 “천지 운로를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놓았으니” 그 짜놓은 도수대로 세상이 돌아간다는 신념에서 그 자신이 세상의 미래를 주관하는 상제라는 확신을 읽을 수 있다. 천지공사란 이처럼 미래의 이상사회에 대한 무한한 대망과 이상사회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적극적인 사명감이 합쳐진 영성적 신비운동이다.
증산은 일본공사(日本公事)를 통하여 내일의 일본의 운명을 점지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의 민중은 증산의 신비운동에서 극일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갖게 되었고, 증산 사후에 갈라진 많은 증산교단에 민중이 몰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소태산은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을 통하여 득도를 하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주창하였다. 이는 그가, 수운과 일부 그리고 증산에 비하여, 시대의 문명사적 변화에 한층 더 민감하게 대응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해 준다. 그는 물질의 변화가 정신문명의 퇴락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노력 없이 성공과 복을 비는 ‘낮도깨비’가 발을 붙이지 못하고,인도정의(人道正義)의 공정한 법칙이 드러나는 대명천지(大明天地)를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소태산은 선인들이 지켜온 민족주의적 개벽사상을 이어받았으나, 그들이 즐겨 쓰던 중국의 상수철학의 개념보다 일원상(一圓相)이나 보은(報恩)과 같은 불교적 개념어를 더 많이 사용하였다.
그리고 소태산은 1918년 3월에 저축조합의 저축금을 수합하여 간척사업을 일으켜 다음해 정관평(貞觀坪)이라는 간척 농장을 세웠으며, 1924년 ‘불법연구회’를 시작하면서부터 교육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소태산은 교육운동과 경제자립운동을 통하여 대명천지의 도래를 위한 적극적인 태도를 보다 근대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