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인(高夫人) 또는 고수부(高首婦)라고 불렀다. 1880년(고종17) 전라남도 담양군 무면에서 부친 고덕삼(高德三)과 모친 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을 믿었고, 정읍군 입압면 대흥리에 이사하여 신씨(申氏)집에 출가하였으나, 29세에 남편을 잃었다.
1907년 강증산(姜甑山)이 정읍군 입압면 대흥리에 살던 차경석(車京石)의 집에 들렀을 때 수부(首婦)로서 증산과 혼인하게 되었다. 혼인한 후에 증산은 고부인에게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 동안 정력을 드렸으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밝히리라.”고 하였다.
1909년 증산이 사망하였지만, 고부인은 그의 사망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꿈에 증산이 나타나 자기는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 초빈(草殯)이 있는 구릿골까지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었다. 다음날 꿈에서 본대로 구릿골을 찾아가 증산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1911년 고부인은 증산의 탄신기념 치성을 드리던 중 갑자기 졸도하여 쓰러졌다가 깨어나게 되었는데, 그 후부터 증산의 성령이 접령되어 모든 언행이 평소 증산의 모습과 흡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증산교를 포교하기 시작했는데 초기 이름을 선도교 또는 태을교라 했다.
이종동생인 차경석의 도움을 받아 교단체제가 강화되고 신도수가 급증하여 큰 발전을 이루어가고 있었으나, 1914년경부터 차경석이 실권을 장악하고 신도들과의 접촉을 방해하였으므로 1918년에는 입암면을 떠나 김제군 백산면 조종골로 옮기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많은 치병활동과 기행이적을 행하게 되는데 신도들의 두통과 치통 등 사소한 질병의 치료는 물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잉태를 시켜 주는가하면 남의 병을 대신 앓아주기도 하여 그 위력이 증산에 버금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판례의 교리사상은 증산의 가르침을 그대로 신봉하는 입장이었다.
1931년에는 이상호(李祥昊)의 동화교(東華敎)와 통합교단을 만들어 활동하였고, 1933년경부터는 옥구군 성산면 오성산에 수양소를 짓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1935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