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교(普天敎)의 창시자인 차경석의 호는 월곡(月谷). 차천자(車天子)라고도 불렸다.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 출생. 동학접주를 역임한 아버지를 따라 동학운동에 가담하였고, 천도교(天道敎) 전남북 순회관(巡回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1907년 강증산(姜甑山)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면서 교통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1909년 증산이 사망하자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 역시 당시 훔치교라고 불리고 있던 증산교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금산사 등 여러 곳을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1년 증산의 부인인 고씨가 증산탄신기념치성을 드리던 중 졸도하였다. 그 뒤부터 고부인이 증산의 평소 언동과 비슷한 행동을 하게 되자, 증산의 영이 감응되었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차경석은 고부인을 앞세워 전라북도 정읍군(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에서 선도교(仙道敎, 太乙敎)라는 이름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다. 교단이 커짐에 따라 실권을 장악한 그는 1918년 고부인이 이 곳을 떠나자 교주가 되었다.
1920년에는 천지운도(天地運度)에 따라 자기가 동방연맹(東邦聯盟)의 맹주(盟主)가 되고, 조선은 세계통일의 종주국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제도를 혁신하여 전국의 신도를 60방주로 나누어 묶고 이를 통솔하기 위하여 많은 간부를 임명하였다.
1921년 일본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을 뚫고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의 황석산(黃石山)에서 대규모 천제를 지내고 국호를 시국(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고 선포하였다.
그 뒤 신도들간에는 그가 천자(天子)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갔고 그를 차천자로 부르게 되었다. 1922년에는 서울 창신동에 보천교라는 간판을 걸게 되면서 보천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해 정읍 본부에 대규모 교당을 신축하였는데 백두산에서 목재를 운반하여 사용할 만큼 교세가 확장되었다.
교세가 커지자 일제는 회유정책으로 전환하였고, 교단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적 성향이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일본총리대신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한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을 순회하면서 대동아단결을 강조하는 친일행각을 하였다.
많은 교단간부들은 차경석의 이와 같은 행동에 크게 반발하여 보천교를 탈퇴, 따로 교파를 만들어 독립하면서 교세가 기울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