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경상남도 민속자료(현, 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정면 2.53m, 측면 2.57m, 용마루 높이 2.95m, 처마 끝 높이 1.6m의 흙담집으로 지붕은 기와를 얹은 맞배지붕 형태다. 당집 옆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뒷벽 가운데에 나무시렁을 가로지르고 위패(마모 상태가 심한데, 后土之神으로 추정됨.)를 모셔 놓았다.
유래에 관한 문헌은 전하지 않으나 1858년에 오조영(吳祖英)이 기록한 〈중수탕산후토사상량문 重修碭山后土祠上樑文〉에 따르면 이 당산은 원래 가조현(加祚縣, 신라 경덕왕대∼조선 세종대)의 사직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가조현이 폐지된 뒤에 사직당의 신을 이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고 마을 이름을 당동으로 했다고 한 것으로 보면 유서가 깊은 제당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으나 중수할 때에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섣달 말에 생기복덕이 있는 사람을 제관으로 선정하고, 제일을 정초의 길일로 택한다.(지금은 정월 보름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제일이 정해지면 마을 입구와 공동우물, 그리고 동네의 집집마다 금줄을 치고 좌우에 황토를 한 무더기씩 두는데, 이것은 부정한 것과 잡신의 근접을 막기 위함이다. 정초의 동제일 앞날에 수백 년 묵은 향나무가 서 있는 우물을 깨끗이 청소한 뒤에 불을 밝히고 제일의 첫 시인 자정에 제를 올린다.
동제당 앞마당에서 장닭(옛날에는 돼지를 썼다고 한다.)의 목을 베어 피를 사방에 뿌리고 닭의 목을 당집 앞 땅에 묻는다. 그리고 먼저 장군봉 · 금귀봉 · 박유산 · 문수산이 있는 사방을 향하여 간략히 제를 올린다. 이것은 사직당 때의 유습이라 한다.
그리고 당집에 새 제기에 닭 · 쌀 · 건어물 · 과일 등의 제물을 차리고 조용히 유교적인 제례를 드리는데, 단잔을 올리고 독축하고 소지를 사른다.
날이 밝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복하고 지신밟기를 한다. 이 동제당은 보기 드물게 중수기(重修記)가 있어 그 유래를 짐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원래 있는 자재를 그대로 두고 덧붙이며 개수를 하여서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고 있는 편이다. 또한 여기에 지내는 제례의식도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