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천동 유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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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천동 유적 중 1군 전경
경주 동천동 유적 중 1군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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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덧널무덤[石槨墓] ·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등이 발굴된 무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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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돌덧널무덤[石槨墓] ·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등이 발굴된 무덤군.
내용

경주분지의 동북편에 솟아 있는 소금강산 지구에는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소금강산의 남서 하단부에는 1969년 사적으로 지정된 탈해왕릉이, 이곳의 남동편 북천변에는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헌덕왕릉이 위치하고 있다. 2개의 왕릉을 제외한 고분군은 2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는데, 탈해왕릉의 뒤편 소금강산의 정상에서부터 남동쪽으로 뻗는 능선상에 분포하는 것을 Ⅰ군, 그 남동편의 다불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분포하는 것을 Ⅱ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Ⅰ군은 동천동 산13·16번지 일대의 능선상에 분포하는 것으로 대·소형의 고분 수십 기가 밀집되어 있는데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봉토분이 있는 반면, 도굴로 인해 봉토가 파괴되고 내부가 완전히 드러나 있는 것들도 많다. 내부가 드러난 것들은 대부분 매장주체가 돌방[石室]인 고분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동천동 와총(瓦塚)이 여기에 있던 것이고, 1994년에는 이곳에서 화장무덤[火葬墓]과 돌방무덤[石室墓]이 하나의 봉토에 들어 있는 것이 경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되기도 하였다. Ⅱ군은 탈해왕릉의 옆 다불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의 오른편 남서로 뻗는 작은 능선상에 분포하는 것으로 2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다. 고분은 도굴로 인하여 파괴가 심하나 주변에 흩어진 석재와 파괴양상으로 보아 돌방무덤으로 판단된다.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와총은 괴석으로 네 벽을 쌓은 장방형의 돌방무덤으로 네 벽은 위로 올라가며 안으로 약간 기울게 쌓았다. 천장은 4매의 판상석으로 덮은 평천장이었다. 널방[玄室]의 크기는 길이, 너비, 높이가 4.03×1.42×1.64m이다. 널방 바닥에는 좌측의 장벽과 후벽에 역‘ㄱ’자 모양으로 2개의 주검받침대[屍床臺]를 배치했는데, 좌벽쪽 것은 길이, 너비가 2.16×0.87m, 후벽쪽 것은 2.27×1.42m이고 높이는 0.15m였다. 널길[羨道]은 우측에 편재되어 있었으며, 널길에도 천장을 가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널방 안에서 암키와와 수키와가 발견되었고, 이외에 토기뚜껑, 굽다리항아리, 쇠손칼[鐵刀子]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축조연대는 경주의 굴식 돌방무덤 가운데는 비교적 빠른 것으로 6세기 중후엽경으로 판단된다.

이들 중 산 26-2번지 일대가 경주시내에 소재하는 경주대대의 군부대 이전 예정지로 선정됨에 따라 사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사업지구내에서 다수의 고분군이 유존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에 1993년 대구대학교 박물관에서 삼국시대 고총고분을 제외한 일부 분묘의 발굴과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결과 삼국시대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1기와 돌덧널무덤[石槨墓] 1기, 고려 말 조선 초의 움무덤 345기가 확인되었는데, 움무덤은 몇 차례의 경작에 의해 봉토가 결실되어 일부 바닥층만 남아 있는 상태였다. 이들 움무덤 중 47기에서는 고려 말 조선 초의 토제병, 청동수저, 청동합, 자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1994년에 경주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고분은 하나의 봉토 안에 돌방무덤 1기와 화장무덤 1기가 조영된 것이다. 봉토는 대부분 유실되었고 높이 3m 정도만 확인되었다. 봉토는 마사토와 점토를 번갈아 가며 쌓았고 둘레에는 20∼40㎝ 가량의 깬돌[割石]을 2단으로 축조한 둘레돌[護石]을 두었다. 조사된 돌방은 이미 도굴로 인하여 파괴되었는데 평면형태가 장방형인 널방의 한쪽에 치우치게 널길을 낸 것으로 추정되었고, 무덤길[墓道]로 추정되는 흔적도 조사되었다. 널방의 크기는 장축은 알 수 없고 단축이 2.45m로 밝혀졌다. 널방은 깬돌로 쌓았고 네 벽이 올라갈수록 내경하고 회를 바른 흔적이 있었다. 화장무덤은 돌방의 남동쪽에서 조사되었는데 발견 당시 이미 일부가 유실된 상태였다. 무덤은 돌덧널을 구축하고 그 내부 남벽 쪽에 골장용(骨葬用)의 뚜껑합을 배치하고 나머지 공간에 뚜껑굽다리접시 5점을 부장한 것이다. 돌덧널[石槨]은 깬돌을 5단 정도로 쌓고 위에 깬돌 2매를 붙여 놓아 뚜껑을 하였다. 돌덧널의 크기는 길이 0.63×0.5m이다. 축조연대는 대략 6세기중엽 이후로 추정되고 있는데, 경주에서 제일 빠른 시기의 화장무덤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한편 이들 상부에서 다수의 삼국시대 토기편과 청동기시대의 석부, 마제 석촉, 반월형 석도편 들이 지표채집되고 있어, 이 일대는 이미 오래 전부터 다수의 집단이 무리를 이루어 생활함과 동시에 집단묘역으로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고분군은 경주의 평지에 축조되던 돌무지덧널무덤과는 달리, 주변의 산지에 무덤이 축조되는 법흥왕 이후의 고분들로 추정되며,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같은 시기의 충효동(忠孝洞), 서악동(西岳洞) 등에 분포하는 고분들과 비견될 수 있다.

참고문헌

『경주시 문화유적 지표조사보고서』(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경주시, 1996)
『국립경주박물관연보』(국립경주박물관, 1994)
『朝鮮古蹟圖譜』3(朝鮮總督府,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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