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고임득(高任得). 여류만담가 제3세대가 되는 그녀는 1943년경서울 정동에 있는 경성음악전문학원에서 성악가 이송락(李松樂)의 문하생으로 노래지도를 받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1944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국민총연맹에서는 당시 많은 연예인(가수·무용수·연극인·희곡배우) 등이 뒤섞인 연예위문단이 조직되어 당국의 지시대로 위문공연에 나서야만 했는데, 이 위문단은 탄광·광산·공장·농촌 등지에 파견되어 노무자들의 사기를 돋구는 명목으로 대동아전쟁완수를 위한 정신력 강화에 주력하였다.
이런 위문단 중에서는 멀리 일본·북해도 탄광지대까지 파견되었으며 고춘자는 성악가 최창은(崔昌殷)이 단장이던 중앙위문대의 여가수가 되어 1945년 초여름 함경북도 지방과 동만주 일대에서 공연하였다.
아오지탄광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으며 모든 질서와 행정이 마비된 상태에서 트럭을 얻어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서울을 향하였으며, 처서가 지나 찬서리가 내릴 무렵 중앙연예단은 경기도 연천에서 처음으로 미군부대와 조우하였고, DDT소독약, 세제 등을 받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고춘자는 서울에서 백민악극단·태평양가극단·백조가극단 등을 전전하면서 여류만담가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악극단 계몽반에서 민속만담가 장소팔(張笑八)과 함께 콤비가 되어 그녀 특유의 속사포만담으로 인기를 끌었다.
라디오방송에 단골 손님이기도 했던 그녀는 때로 김영운(金永雲)과 대화만담도 같이 하였다. 그녀는 1994년 지병으로 별세하였으며, 그녀와 함께 만담을 하던 장소팔·김영운·김뻐꾸기 등은 ‘한국만담보존회’를 만들어 이 시대에 부응하는 만담개척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