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군사정부의 포고령 6호에 의해 기존의 모든 사회문화예술단체가 해산되고, 12월 5일 당시 공보부와 문교부에서 예술단체는 그 성격이나 예술적 장르가 유사한 분야별로 재조직할 것을 종용하였다.
1962년 12월 18일 국회의사당(세종로소재 5·16직후 재건국민운동본부) 메인홀에서 대중연예인들이 총동원되었다. 이 당시 기류로 보아 해방직후 조직되었던 모든 공연단체의 총집합체이던 “한국무대예술원” 산하 회원이던 악극단, 가극단, 음악 계통의 연예인들의 참석수가 압도적이었다. 다음으로는 여지껏 연예계에서는 이방지대에 속해있던 주한 미8군 계통의 전문순회공연단체 연예인들이었다.
기존해 있던 한국무대예술원의 기간단체로는 극작연출가협회, 연극연기자협회, 악극연기자협회, 무대음악인협회, 무대무용협회, 무대미술협회, 가수협회, 기획자협회 등이다. 이 중에서 극작연출가협회와 연극연기자협회가 하나로 통합 연극협회가 창설되었고 나머지 협회는 연예협회로 통폐합되었다. 또 하나 이색단체로 대중가요 작사·작곡자의 모임이던 대한레코드작가협회가 있었다.
연예협회 창립총회에서 정관 수정·통과시킬 때(임시의장 황문평) 새로 탄생되는 협회의 명칭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통념으로는 '연예'라는 어휘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개화기 이후 이질적인 외래대중문화가 도입될 때 곡예(서커스)나 마술같은 부분의 총칭이 연예(일본인 발상이지만)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중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문화예술계에서 백안시 당하고 천박한 예능인으로 취급당해 피해의식이 컸었거니와 급변하는 사회정세에 적응하기보다는 새로운 조직 속에서 대중예술인들의 위치를 찾아보자는 자아의식이 강하게 움트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법인체로 발족한 한국연예인협회는 예총(藝總) 산하의 한 단체로 1963년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했다. 대중예술 단체에 회원단체로 가입되었다. 연예문화의 발전과 향상을 도모하며 연예활동의 질서확립과 대중예술의 건전한 진흥책을 강구함으로써 회원간의 친선과 단결로 사회적 지위 및 생활향상 등의 권익을 옹호한다는 목적으로 출범하였다.
이 협회는 창작자(작사·작곡 및 무대공연 연출에 종사자들), 가수, 무용수, 경음악연주가, 연기인(코메디언) 등 5개 분과로 구성된 조직을 가지고 있는데 1998년 8월 현재, 회원수는 총 서울(본부) 2만 7300명, 지부회원(2만 6000명)으로서 예총회원 10개 단체 중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지부라함은 예총에 각 지부 산하에서 연예인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회원증 보유자를 말한다. 정기적으로 회원자격증(기능별)격인 회원증 발급으로 그 공신력을 과시하고 있다. 1970년 후반부터 동남아 전역을 비롯한 해외출연 연예인이 늘어나면서 일본과 미국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1983년부터는 『가수』, 『창작』 등의 제호를 가진 전문적인 기능적 정기간행물도 발행하고 있다.
초대 이사장 박시춘(朴是春: 가요작곡가), 2·3대 황문평(黃文平: 영화음악 작곡 및 뮤지컬 가요작곡가) 4대 박시춘, 5대 박호(朴虎: 연출가 및 연예기획자), 6대 도미(都美: 가수), 7·8대 박일호, 9대 이상우(李尙雨: 연주인), 10대 정상동(鄭相童: 연주인), 11·12·13대 석현(石玄: 연기자)으로 이어지고 있다. 역대 이사장 중 현 석현 이사장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해마다 인기연예인(코미디언, 가수, 무용수)들의 자선공연을 해서 그 수입금으로 해마다 사회에 봉사하는 사람들(1회 등대직 10명, 2회 오지 우편배달부 10명, 3회 오지 초등학교 선생님, 4회 119소방대원 10명)을 초청 상금 200만 원과 서울 관광을 시켜왔다. 특히 연예인들의 위상과 사회참여도를 감안 「대한민국연예예술상」 제도를 1994년부터 실시하고 있다.
1974년에는 가수 최희준(崔喜準)이 대통령상을 받았고, 1975년에는 가수 이미자(李美子)가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그리고 1976년에는 가수 패티 김(金)이 문화훈장 화관장을, 1977년에는 코미디언 남보원이 문화훈장 화관장을, 1978년에는 노래 그룹 코리아나가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제1회(1974년) 연예발전공로상은 문체부장관상으로 가요작곡가 박춘석(朴春石)이 수상했다. 제2회 문체부장관상은 가수 고운봉(高雲峰)이, 제3회 문체부장관상은 작사가 유호(兪湖)가 수상했다. 제4회 특별공로상은 가수 인순이가, 제5회 국무총리상은 심철호(沈哲浩)가 수상했다.
코미디언 출신으로, 한국연예인으로서는 최초로 중국에 건너가 등소평 큰아들(지체부자유자)과 교분을 두텁게 하였고, 현재까지도 「사랑의 전화」라는 봉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방송(TV, 라디오)의 사회자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상벽, 서세원, 이홍렬, 임성훈, 김학래, 심형래, 이용식, 임하룡이 문체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1982년 10월 문화의 달에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김정구(金貞九)가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이것이 연예계의 첫영광이었다. 이 당시 “유행가 잘 부른다고 훈장을 주다니”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통념이었다. 그러나 1982년 10월 문화의 날에도 가요작곡가 박시춘도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1990년에는 가수 황금심(黃琴心)이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그 후 코미디언으로 유명하던 김희갑(金喜甲)이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1992년에는 코미디언 구봉서(具鳳書)도 문화훈장 옥관장을 받았다. 또 한 사람 가요작사가로 유명한 반야월(半夜月)이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1995년에는 가수 박일호(朴一鎬), 박호(朴虎)도 문화훈장 화관장을 받았다. 1996년 10월 문화의 날에는 1960년에 별세한 가요작곡가 이재호(李在鎬)가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았다. LA에 살고 있는 그의 부인이 고인의 문화훈장을 받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왔었다.
이와 같이 대중연예인들도 그가 남긴 업적에 따라 대중사회의 기여도가 참작되고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있다. 또한 다방면 사회봉사활도에도 참여하고 있다. 문화훈장을 받는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화되어 있다.
이렇게 연예인들의 위상이 확립되도록 노력한 현 연예협회의 이사장 석현(石玄)의 헌신적인 활동력으로 대중연예는 오로지 상업예술이라는 일반적인 관념이 바뀌어가고 있다.
또한 외국 유학이나, 국내 대학을 졸업하고 대중예술, 특히 영화와 대중가요에 전력투고하는 젊은이들에게 큰 희망을 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