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후반 연극무대에서 수많은 연극을 공연할 때 주로 인정극(人情劇) 또는 비극(悲劇)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렇게 무거운 극본이 비극이고 보니, 이에 대칭하는 희극(喜劇)이 필수적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때에는 본격적인 사회풍자극이 불가능하였다.
그야말로 얄팍한 희극이 안성맞춤이었다. 당시 <스켓치>니 <넌센스>니 하는 코믹한 촌극(寸劇)이 극장의 막간무대에서 레코드 레퍼토리로 자주 등장하였다.
이는 1930년대의 레코드 단면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하였다. 희극배우들이 단막극을 ‘코미디’라는 용어로 쓰기 시작한 것이 일제강점기 말이었다. 일찍이 유럽과 미국에서 연극의 재채와 희극적인 연기를 광의적으로 코미디라고 써왔다.
그러나 일제는 외래어(특히 영어)를 못쓰게 하였으므로 현대적 감각을 표출하는 연기를 통칭 코미디라고 하였으나 사용이 불가능하였고, 해방 직후부터 연극단 공연무대에서보다 악극단과 가극단의 희극배우 중에서 비교적 원맨쇼에 가까운 재치를 뽐내는 연예인을 코미디언이라고 부르는 것이 관용어로 굳어져갔다.
만담가 신불출(申不出)은 1906년생으로 경기도 개성(開城) 출신이다. 그는 연극배우 양백명(梁白明)이 주동이던 연극단 신무대(新舞坮)의 배우로 연예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천한수(千漢洙)·임서방(任曙芳)·고한승(高漢承)·임선규(林仙圭) 등의 극작가들과 교제하면서 연극각본도 더러 썼다.
그는 나름대로 연극이론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화술(話術)도 좋았다. 한문지식도 풍부하여 가끔 연예인들의 작명(作名, 즉, 예명藝名)도 해 주었다.
그가 극단 신무대에서 단역배우로 출연할 때 자기 예명을 난다(難多)라고 작명하였다가 성이 신(申)씨이고 보니 ‘신난다’라고 발음하여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연극 <사생결단>에서 주연을 맡아 주목을 받았고, <만주의 지붕밑>을 통하여 스타가 되었다. 그는 공연 때마다 막간에 나가 객석에 감사하다는 막간연설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신불출 주연인 연극 <동방이 밝아온다>를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 대본(검열대본)에 없는 대사(臺詞)를 가끔 즉흥적으로 잘 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때에도 그는 공연 중에 “새벽을 맞아 우리 모두 잠에서 깨어납시다”라고 하자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었고, 흥분한 그는 “삼천리 강산에 우리들이 연극할 무대는 전부 일본인의 것이고 조선인 극장은 한두 곳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라고 즉흥대사를 하였다.
검열대본에도 없는 대사를 하자 경관석에 앉아있던 일본 경관이 벌떡 일어나 호각을 불며 공연을 중지시켰으며, 신불출은 곧장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당시 민족주의 색채를 조금이라도 띤 대사를 하면 징역감이었다. 그러나 신불출은 단성사 사장 박승필의 보증으로 연극계 은퇴를 서약하고 가까스로 풀려났다.
이때부터 그는 연극은 하지 못하고 미신타파운동에 앞장선다는 명목으로 만담가로 나서게 되었다. 다시는 안 나온다는 뜻으로 신불출이라는 예명이 생겨난 것이다.
평소 신불출은 소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기질이 있던 인물이었다. 이 시대에는 새로운 사상인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가장 진보적인 인물로 인식하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그는 실제로 아나키스트 아림(椏林)이라는 자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신불출은 1934년 말 Okeh레코드사에서 대화만담(A면:<월급날 아침>, B면:<월급날 저녁>)을 윤백단(尹白丹)과 함께 출반하였다.
신불출이 출반한 레코드 드라마로는 <낙화암>이 있으며, 이는 신불출이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엮었다. 단소 반주는 김종기(金宗基)가 맡았다.
신불출과 신은봉은 콤비가 되어 대화만담 <만사 OK>·<홍백타령 紅白打令>·<곰보타령>·<국수한사발>을 출반하여 인기를 끌었다. 극작가 이서구(李瑞求)가 편극한 <신가정생활>음반에는 신불출과 여배우 김연실(金連實)이 녹음하였다.
1933년 경성방송(京城放送)이 제1방송(일본어방송), 제2방송(조선어방송)을 실시하면서 제2방송에서 우리의 옛이야기 시간을 ‘야담(野談)’ 시간이라고 했다. 일본의 요세(寄席:野談·才談 등의 연예를 흥행하는 곳)에서 재담꾼들을 통칭 만자이(漫才) 또는 라구고(落語)라고 하였다.
1930년대 말 윤백남(尹白南)·신불출 등이 중심이 되어 담우회(談友會)를 만들었다. 야담·만담 등의 숨은 재간이 있는 사람들이 본격적인 희극운동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가수지망생 이복본(李福本)은 샹송흉내와 JAZZ를 잘 부르는 가수로 당시 프랑스의 배우겸 가수인 모리스 슈바리에의 흉내를 잘내는 최초의 보드빌리언(Vauevillian)이었다. 그의 특징 중의 하나가 독일의 히틀러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일품이었으며, 그의 노래가 Okeh레코드에 취입되었다.
희극배우이던 김원호(金元浩)는 동양극장에서 만담가 손일평(孫一平)과 함께 주고받는 재담을 하여 인기를 끌었다. 김원호는 호리호리한 키에 앙상한 편이며, 손일평은 작은 키에 몸집이 비대하였다.
그들은 무성영화시대 미국의 희극배우 콤비인 로리와 하디를 닮았다고 해서 별명이 “홀쭉이와 뚱뚱이”라고 불렸으며, 이들의 콤비를 신불출이 대화만담(對話漫談)이라는 휘호를 써주었다.
1940년대 이후 신불출은 많은 음반을 내놓고 대중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으며 만담가로 등장하여 일제강점기 말기의 아슬아슬한 시국 풍자만담으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8·15광복 후, 사회가 혼란 그 자체였으며 공연예술분야(주로 연극분야)에서는 설익은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빈번하였다.
1946년 초부터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론이 극명하게 좌우로 선이 그어졌다. 당시 좌익사상이 노골화된 연극공연이 성행하였고, 극우 애국청년단체들의 테러가 빈번한가하면 순수 민족진영 단체들이 공연하는 악극단 공연장소에 극좌파 청년들의 테러가 난무하였다.
1947년 초여름 중앙극장에서 시국강연과 유사한 모임이 있었다. 이때 여흥격으로 무대에 등장한 만담가 신불출이 태극기 모양새를 놓고 그의 특유의 화술로 해괴망칙한 풀이를 하였다.
즉 태극기의 4괘(四卦)는 현재 모스크바 3상회담에서 결정한 사대강국(四大强國: 美·英·蘇·中)이 질시하고 있는 조선인데, 중앙의 태극모양의 윗부분은 적색(赤色)이고 하부는 감색(紺色)이다.
세월이 갈수록 비바람이 불어 태극기가 물에 젖으면 자연스럽게 위에 있는 붉은 색깔이 녹아 흘러서 감색부분까지 붉으스레해지는 것이 자연현상인 것처럼 현재 38선으로 남과 북이 갈라져 있지만 차차 세월이 가면 남한도 붉으스레해진다.
다시 말해서 남한도 공산국가가 되는 것이 자연현상이요, 이것이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장차 운명을 예측한다고 설파하였다.
이 말을 들은 객석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였고 “저 미친놈 잡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신불출을 잡아 혼줄을 내야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객석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신불출은 걸음아 나살려라 무대 뒷문으로 빠져나가 중앙극장 우측에 있던 목욕탕을 통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신불출은 태극기해설만담으로 그는 일체 대중 앞에 서는 것을 삼갔으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정식으로 출범한 이후 평양으로 월북하였다.
1939년 일제가 소위 창씨개명(創氏改名)을 법률로 정해 강요하던 때, 신불출은 일본식 이름을 강원야원(江原野原)이라고 하였다. 이를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에하라 노하라’로 될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넋두리이기도 하였다. 신불출은 이렇게 일제에 반항하였다.
1934년 Okeh레코드사에 박부용(朴芙蓉)이 취입한 신민요 <노들강변>(문호월작곡)도 그가 작사한 작품이다. 김원호·손일평의 대화만담콤비 중 김원호가 폐결핵으로 이승을 떠나자 손일평은 1943년 라미라가극단원(羅美羅歌劇團員)이었던 지일연(池一蓮)과 같이 한국 최초의 남녀 대화만담가로 인기를 끌었다. 손일평은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많이 했다는 죄로 6·25전쟁 때 북으로 끌려갔다.
일제강점기 한두 곡의 가요를 취입했던 김윤심(金允心)은 여류만담가로 등장하여 여성계몽에 앞장섰다. 유난히 피부가 검은데 검은테안경을 쓴 것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으며 8·15광복 직후 활동을 많이 하였다.
1948년 5·10선거 때 여권신장과 여성참정권을 부르짓는 만담으로 당시 대한부인회 회장이던 박순천(朴順天) 여사의 총애를 받았고, 초대 상공부장관을 지낸 임영신(任永信) 여사의 비서까지 하였다.
1940년 조선악극단에서 가장 인기가 높았던 코미디언 이종철(李鍾哲)에게는 한국의 ‘리챠드 달매취’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일찍이 ‘연극호’라는 극단에서 활극(活劇)배우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젊은 시절 소위 기계체조로 몸이 단련되었으며, 왜소한 체구에 비해 날쌘돌이 같은 명배우였다.
1950년대 중반 연예가에서 과거 대화만담형식에서 진일보하여 재치있는 개그를 구사하는 코미디언 양석천(梁錫天)과 양훈(楊薰)의 존재가 돋보이기 시작하였다. 일명 ‘홀쭉이와 뚱뚱이’의 활약은 격조있는 사회풍자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930년대 후반에 등장했던 김원호와 손일평의 제2대인 셈이다.
이들 콤비는 일반 공연무대에서 특성있는 일종의 사회계몽을 겸한 코미디를 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는 라디오방송에 등장하면서 폭넓은 팬을 확보하였다. KBS라디오 공개방송에 정기출연하였으며, 1958년 홍콩에 가서 최초로 한국·홍콩의 합작영화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1961년 TV방송국이 개국되면서 브라운관의 총아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2년 시민회관이 화재로 불타자 일반대중과 만날 기회가 적어졌다. 1994년 한국연예협회로부터 뚱뚱이 양석천은 특별공로상패를 받았으며 “내가 죽을 때 이 영광스런 트로피를 관속에 넣어가지고 가겠다. 그 이유는 저승에 먼저 가 있는 홀쭉이에게 이 상을 타 가지고 오느라 늦었다고…. 이 상은 우리들이 탄 상이니까.”라고 수상소감을 말하여 홀쭉이와 뚱뚱이를 기억하는 많은 후배들에게 연예인의 기질과 우정의 흔적을 남겼다.
1967년 5월 26일 세종로에 있는 시민회관 무대에서 <살살이 몰랐지?>라는 제목으로 코미디언 서영춘(徐永春)과 백금녀(白金女)의 만담 리사이틀이 있었다. 이 쇼형식의 무대구성과 연출은 당시 일간스포츠사의 연예부장이던 정홍택(鄭鴻澤)이 맡아 현대적으로 꾸몄다.
일제강점기 말에 가수로 출발했던 고춘자(高春子)는 1954년 환도 이후 민속민요·만담가인 장소팔(張笑八)과 함께 대화만담콤비를 이루면서 여성만담가로 전성기를 맞았다. ‘장소팔과 고춘자’의 대화만담 콤비는 폭넓은 해학과 걸쭉한 입담, 그리고 속사포같은 화술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춘자는 코미디언 김영운(金永雲)과도 콤비가 되어 각종 행사에 약방의 감초처럼 초청되었으며 1993년 무렵까지 라디오의 특별코너에 출연하여 노년층의 향수를 달래 주는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서도 곧 건강이 회복되면 곧바로 무대에 나서야 된다는 의욕을 보이기도 하였다.
현재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장소팔이 중심이 되어 ‘만담보존회’, 김영운과 김뻑국이 이끄는 ‘민요민속악단’이 있으며, 여류만담가 백순예·장소희 등은 한국적인 정서가 흐르는 만담계를 계승발전시킨다는 기백을 발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