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귀기둥 밑에는 거칠게 다듬은 네모난 주춧돌을 깔고, 나머지 기둥은 곱게 다듬은 둥근 주춧돌로 받쳤다. 기둥 위에는 춤이 큰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놓고 그 위에 포작을 짜올렸다.
어간(御間 : 건물의 중앙칸)에 2구, 양옆 협간(挾間)에 1구씩 공포를 배열한 다포식을 취하고 있는데 세부를 처리한 수법은 비교적 오래된 것이다. 안팎 모두 이출목이며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은 삼각형이다.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아서 건실한 멋을 느끼게 해 주며, 내부 공포 가운데 대들보를 받친 공포의 맨 끝부분은 보머리모양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내부는 가운데 뒷줄에 고주(高柱) 2개를 세우고, 그 사이에 불단(佛壇)을 설치하여 불전의 기본형식을 갖추고 있다.
고주 위로 대들보를 걸치고 대들보와 바깥두리기둥 사이에는 충량(衝樑 : 한 끝은 기둥에 짜이고 다른 끝은 들보에 걸치게 된 측면의 보) 2개씩을 건너질러 놓았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만들되 불단 위쪽은 한 단 높게 하였고, 불단 위에는 보개(寶蓋)의 구실을 하는 닫집을 가설하였다.
단청은 색상이 명쾌한 금(錦) 단청을 입혔다. 1965년 8월에 해체 보수할 때 가운데 칸 마루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401년(태종 1)에 창건하였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과 1618년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하였는데 위 상량문은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상량문 앞부분은 광해군 때의 2중창(二重創)에 대한 기록을 다시 적은 것인데, 영조 때의 공사를 3중창이라 적었으나, 공사기일이 한달 안팎인 것으로 보아 부분적인 수리에 불과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