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복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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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때 백관의 관복을 연구하고 제정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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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때 백관의 관복을 연구하고 제정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내용

원래 태종이 건국 초기의 의례(儀禮)를 정비하기 위하여 예조 외에 1410년(태종 10)에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였다. 광범위한 의례상정 중에서도 계급적 신분사회의 표상이 되는 백관관복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1416년 1월에 독립기구로서 설치하였다가 그해 5월에 폐한 임시기구였다.

설치 당시의 위치는 서울 구리고개(仇里古介)였으며, 예조판서 조용(趙庸)과 예문관제학 허조(許稠)가 제조(提調)로서 이를 주재하였다. 관복색은 주로 백관의 조복(朝服)과 제복(祭服)을 상정하였으며 특히 조복에 치중하였다. 이는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를 기본으로 삼았다.

1370년(공민왕 19) 명나라 중서성에서 예부의 정문(呈文 : 하급관청에서 상급관청에 보내는 공문서)에 의하여 명태조의 뜻을 받들어 고려에 사여된 관복자문(冠服咨文)의 이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을 충실히 따라 명나라 관등에 비하여 2등급 낮추어 백관관복을 제정하였다.

관복색에서 제정한 백관의 관복을 보면, ① 관(冠)은 양관(梁冠)으로 1품 5량, 2품 4량, 3품 3량, 4·5·6품 2량, 7·8·9품 1량이고, ② 혁대(革帶)는 1·2품 금식(金飾), 3·4품 은식(銀飾), 이하 9품까지 동식(銅飾)이며, ③ 패옥(佩玉)은 1·2품 옥(玉), 이하 9품까지 약옥(藥玉:인조옥)이다.

④ 수(綬)의 사색(絲色)은 1·2·3품이 황·녹·적·자 4색사, 4·5·6품이 황·녹·적 3색사, 7·8·9품이 황·녹 2색사이며, 수금(綬錦)에 1·2품은 운학(雲鶴)을, 3품은 수리매[鵰]를, 4·5·6품은 까치[鵲]를, 7·8·9품은 뜸부기[鷄鶒]를 수놓았고, 수환(綬環)은 1·2품이 금환, 3·4품이 은환, 이하 9품까지 동환으로 각 2개씩 장식하였다.

⑤ 홀(笏)은 1품에서 4품까지 상아를, 이하 9품까지 괴목을 썼다. 그밖에 붉은 비단으로 된 의(衣)·상(裳)·폐슬(蔽膝)과 백사중단(白紗中單), 흰버선[白襪], 검은 신[黑履], 각잠(角簪) 등은 1품에서 9품까지 동일하였다.

관복색에서 조복과 제복제도를 확정한 결과, 1416년 11월 태종이 명제(明帝)에 대한 망궐하례(望闕賀禮 : 임금이 중국 황제가 있는 쪽을 향하여 절하는 의식)를 거행하였을 때 백관들이 비로소 제복을 착용하고 이에 참례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관의 조복·제복·공복(公服)·상복(常服)의 제도는 1426년(세종 8) 2월 관복지제(冠服之制)의 제정을 통하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 제정된 백관관복은 그뒤 시대에 따라 다소의 변모가 있었지만 조선시대 500여 년간 관복의 기본형태가 되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5)
『한국복식사연구』(김동욱, 아세아문화사,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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