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지방 세력가인 영규(英規)의 아들이다. 준필(俊必)이라고도 한다. 신라 말년에 잡찬(匝飡) 충지(忠至)가 금관고성(金官高城)을 취하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을 칭하며 호족으로 세력을 떨쳤다.
영규가 충지의 위엄을 빌려 사당을 빼앗고 음사(淫祀)를 행하려 하여 단오날에 고사를 지내는데 사당의 대들보가 무고히 떨어져서 영규는 치어 죽었다. 이에 충지가 두려워하고 반성하여 금관국(金官國) 시조 수로왕(首露王)의 진손(眞孫)인 규림(圭林)에게 옛날처럼 제사드리도록 하였다.
이러한 제사는 규림이 죽은 뒤에도 그의 아들인 간원경(間元卿)이 계속 잘 받들어 왔는데, 단오날 사당에 드리는 제사에 영규의 아들인 교필이 발광하여 간원의 제물을 철거하고 자기의 제물을 진설하여 제향하다가 삼헌(三獻 : 제사 때 술잔을 올리는 일, 즉 초헌·아헌·종헌)을 마치지 못하고 별안간 사나운 병을 얻어 집에 돌아가서 곧 죽었다. 그래서 아버지 영규와 더불어 음사와 관련하여 앙화를 입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