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등은 아찬(阿飡)이었다. 신문왕이 납비(納妃)할 때, 비를 궁내로 모셔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즉, 신문왕은 683년(신문왕 3)에 김흠운(金欽運)의 딸인 신목왕후를 받아들였는데, 먼저 왕의 작은아버지인 이찬(伊飡)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흠운의 집으로 파견하여 부인으로 책봉하였다.
같은 날 묘시(卯時)에 길숙을 파진찬(波珍飡) 대상(大常)·손문(孫文), 아찬 좌야(坐耶)와 더불어 파견하였고, 각 처랑(妻娘) 및 양부(梁部)·사량부(沙梁部)의 부녀자 30인씩으로 하여금 부인을 궁내로 맞아들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