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원류연표 ()

언어·문자
문헌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어윤적(1868-1935)이 1909년 국문의 원류에 관하여 작성한 연표.
정의
일제강점기의 역사학자 어윤적(1868-1935)이 1909년 국문의 원류에 관하여 작성한 연표.
서지적 사항

1909년 3월에 집필한 국문연구소 보고서 필사본에 수록된 별표이다. 그는 국문연구소의 사업이 마무리되어 그 보고서에 첨부할 ≪국문연구≫ 1권을 제출하였는데, 이 연표는 그 -‘연원급 자체발음의 연혁’ 끝에 별표 제1종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

순한문 필사로 불과 22장 93항의 분량이나, 이런 내용의 연표로서는 최초의 저술이다. 그 서술형식은 먼저 연대를 앞세우고 다음 줄부터 내용을 기록하였는데, 연대는 국문기원과 간지(干支)와 왕조년(王朝年)의 차례로 병기하였다. 특히 국문창작년인 세종 25년 계해를 국문기원으로 설정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연표의 내용은 국문의 연원과 자체발음의 연혁에 관한 그 국문연구안의 본문을 종합하였으며, 그 논술은 증거자료에 의하여 판단하는 실증적 태도를 취한만큼 대체로 정확하였다. 연표의 생명인 정확성을 기하였다는 점에서 이 연표는 가치가 크다고 여겨지거니와, 그 사실은 본문 끝에 명시한 인용급 참고서목이 뒷받침하고 있다.

따라서, 그 근거는 참고서목에 나타난 ≪국조보감≫, 성현의 ≪용재총화≫, 홍문관의 ≪문헌비고≫,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등이며, 서술기간은 무릇 4,000여년에 이른다. 국문기원전은 주로 건국과 문자 및 이두 등에 관한 사항을 기록하였다.

기원 후는 주로 국문과 관련된 문헌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특히 눈길은 끄는 것은 서기 284년 박사 왕인(王仁), 1804년 일본의 신자일문전(神字日文傳) 등에 관한 기술이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일본에 문자를 전수하고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것은 1443년(세종 25) 훈민정음 창제, 1446년(세종 28)년 ≪훈민정음≫ 반포 등의 기록이다. 반면에 문제될 기록도 있다. 1770년(영조 46) 즈음에 신경준의 ≪훈민정음도해≫ 1권이 저술되었다고 한 연대, 1864년(고종 1) 강위의 ≪의정국문자모분해≫가 저술되었다고 한 연대 등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자에는 총순 정순룡의 집에 한권이 있다(今鄭摠巡淳龍家藏一本)는 희귀한 정보가 밝혀져 있다. 또한 1796년(정조 20) ≪어정 규장전운≫ 발행, 1898년 주시경의 ≪국어문법≫ 저술, 1906년 권정선의 ≪정음종훈≫ 저술 등은 연표로서 중요한 기록이다.

의의와 평가

이 문서는 1909년 12월 28일 학부대신에게 보고된 유일본으로 일본 소창문고(小倉文庫)에 비장되어 있어 학계에 유포되거나 영향을 주지도 못하고, 저술된지 60여년만에 비로소 햇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일찍이 작성된 국어와 국자에 관한 주체적 연표라는 점에 역사적 가치가 있으며, 근대에 이룩된 국어학사의 통사적 사료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당시의 국문연구안이 원래 영성한 개화기 국어학사의 자료로서 매우 귀중하지만, 연표의 본문인 그 ‘국문연원급 자체발음의 연혁’ 부분은 최초로 서술한 일련의 국어학사로서 재평가되어야 한다,

집필자
김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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