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학선은 이 날 오후 1시 10분경순종의 성복제(成服祭)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창덕궁으로 들어가던 일본인 3명, 즉 국수회 지부장 다카야마(高山孝行)와 부회 의원 사토(佐藤虎次郎)·이케다(池田長次郎) 일행을 사이토로 오인하고 비수로 찔러 다카야마를 죽이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혔다. 송학선은 현장에서 붙잡혀 순국하였다.
그런데 송학선의 의열 투쟁은 당시 일부 의열 투쟁의 경우처럼 어떤 특정한 주의나 사상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재판 예심 때 재판관에게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 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죽이지 못한 것이 저승에 가면서도 한이 된다”고 말하였다.
이는 그의 의거가 순수한 민족적 의분에서 비롯된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비록 그 원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지만, 이 의거는 순종 서거 후 동요하고 있던 학생층과 일반 대중의 민족 의식을 크게 자극시키는데 충분하였다.
송학선은 붙잡힐 당시 부근에 있던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만세를 불러라”고 몇 차례 호소하였고, 또 이 사건은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학생들의 민족적 의분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의 공판정에는 언제나 학생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몰려들었던 것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증명한다.
금호문의거 자체는 비록 실패하였으나 당시 국내외에서 조직적인 무력 항쟁의 길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 빈발하고 있던 의열 투쟁의 하나로서 민족운동을 고무하여 6·10만세 운동의 발발을 자극하는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