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예안(禮安). 충청남도 홍주 출신. 증조는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낸 이완(李烷)이고, 할아버지는 이원규(李元圭), 아버지는 이종원(李鍾源)이며, 외조는 안규묵(安奎黙)이다.
충청북도 진천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신분은 향반(鄕班)으로,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도하여 동학을 적극 포교하면서 농민을 규합해 나갔다.
이 때문에 체포령이 내려져 피신하였는데, 1866년에 다시 체포령이 내려지자 충청남도 일대로 피신하였다. 피신 중에도 동학을 적극 포교하면서 농민을 규합해나갔기 때문에 또다시 관의 추적을 받아 1869년말에는 경상남도 진주일대로 피신, 잠복하였다.
이곳에서 이름을 주성칠(朱成七)로 고치고, 1870년 7월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작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으로 쳐들어가 새 왕조를 세우겠다는 정치적 야망을 품고, 양영렬(楊永烈)이 추천한 초계의 정만식(鄭晩植)과 정만식이 추천한 장경로(張景老)와 함께 농민을 규합하여 진주군기고(晉州軍器庫)의 군기를 빼앗아 금병도(錦屛島)로 가서 중국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웠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진주작변이 실패한 뒤 경상북도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동학의 제2대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하여 동학교문 전체의 신원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워 1871년 3월 10일 이른바 이필제의 난을 일으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해 8월 문경에서 봉기하려다가 체포되어 12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능지참(凌遲斬) 교수형을 당하였다. 동학에 입교한 뒤 9년간에 걸쳐 진천·진주·영해·문경에서 4회의 농민대봉기를 조직, 주도한 농민운동의 지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