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송인수(宋仁壽)·송학선(宋學善). 서울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阿峴北里: 지금의 서울 아현동)로 이주,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인쇄직공 송성진(宋聖振)의 아들이다. 성품이 과묵하고, 남과 언쟁을 하지 않았으며, 청결한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집안이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하였다. 13세 때 가족이 흩어져 거리를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도 하였다. 1909년 남대문로에 있는 일본인 경영의 오쿠다농구회사[奧田農具會社]의 고용인으로 일하게 되고, 아버지 역시 인쇄공으로 일하게 되어 한가족이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7년 뒤 각기병으로 실직하였다.
일본인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며 일제에 대한 원한이 쌓였고, 사회적·민족적으로 항일의식에 눈뜨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이토[伊藤博文]를 사살한 안중근(安重根)을 숭배하고, 자기도 총독 사이토[齋藤實]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1926년 3월 잠시 사진관에서 일하면서 양식도(洋食刀)를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칼을 품고 과자행상을 가장해 사이토를 노렸다. 그 해 4월 26일 순종이 죽자, 사이토가 조문하기 위해 창덕궁으로 올 것을 기대하고 4월 28일 금호문(金虎門) 앞에 나아가 대기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일본인 3명이 탄 자동차가 금호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비호같이 자동차에 뛰어올라 이들을 찔렀다.
그러나 이들은 총독 일행이 아니라 경성부회 평의원인 다카야마[高山孝行]·사토[佐藤虎次郞]·이케다[池田長次郞] 등이었다. 현장에서 붙잡혀 1926년 11월 10일 사형이 확정,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