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학측의 기본 사료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필제 · 최시형 등은 3월 10일(음) 교조 순교의 원일(寃日)을 영해봉기일로 정하고, 사전 면밀한 담당부서를 정하여 봉기를 계획한 뒤 동학 조직망을 이용하여 경상도내의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먼저 이필제는 천제(天祭)를 지낸 뒤 최시형과 더불어 500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야반(夜半) 게릴라작전법으로 영해부를 야습하여 군기고의 병기를 접수한 뒤 부사 이정을 문죄, 처단하였다.
당시 정부측은 “이는 어떠한 적도인지 알 수 없다”라며 당황해 했으며,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겁을 먹고 모두 도망쳤다.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 이필제는 이 해 8월 2일 문경 봉기를 주모하다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