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제의 난 ()

근대사
사건
1871년(고종 8) 3월 10일(음) 동학교도인 이필제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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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71년(고종 8) 3월 10일(음) 동학교도인 이필제가 동학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영해에서 봉기한 사건.
역사적 배경

1863년(철종 14) 동학에 입교한 이필제는 자신이 체포되어 처형당하는 1871년 말까지 9년 동안 진천 · 진주 · 영해 · 문경 등지에서 4번에 걸쳐 봉기를 주도하였다.

특히 1871년 3월 10일(음) 전개된 영해봉기는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1870년 7월 진주 작변(作變)에 실패한 이필제는 영해로 피신, 잠복하여 5차례에 걸쳐 최시형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요청하였다. 이에 최시형은 수일간 이필제와 머물면서 영해봉기를 계획하였다.

경과 및 결과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이 난을 동학과 관계없는 민란으로 보아왔고, 또한 동학측에서도 최시형이 이필제의 요구를 끝까지 거절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최근 동학측의 기본 사료가 발견되면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필제 · 최시형 등은 3월 10일(음) 교조 순교의 원일(寃日)을 영해봉기일로 정하고, 사전 면밀한 담당부서를 정하여 봉기를 계획한 뒤 동학 조직망을 이용하여 경상도내의 동학교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먼저 이필제는 천제(天祭)를 지낸 뒤 최시형과 더불어 500여 명의 동학군을 이끌고 야반(夜半) 게릴라작전법으로 영해부를 야습하여 군기고의 병기를 접수한 뒤 부사 이정을 문죄, 처단하였다.

당시 정부측은 “이는 어떠한 적도인지 알 수 없다”라며 당황해 했으며, 인근 고을의 수령들은 영해봉기에 겁을 먹고 모두 도망쳤다. 이곳에서 성공을 거둔 이필제는 이 해 8월 2일 문경 봉기를 주모하다가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동학 최초의 교조신원운동과 반봉건투쟁을 전개한 영해봉기는 분산고립적인 당시의 일반 민란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동학조직망을 통한 광범위한 인원동원, 야습작전 등으로 강한 저항력을 보여주어, 후기 전반적 농민봉기의 맹아(萌芽)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목된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최선생문집도원기서(崔先生文集道源記書)』
『교남공적(嶠南公蹟)』
「고종조의 민란연구」(박경성, 『인천교육대학논문집』14, 1980)
「신미년(1871) 이필제난고: 동학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김의환, 『우리나라 근대화사논고』, 삼협출판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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