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예천군, 서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북도 괴산군, 남쪽은 상주시, 북쪽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충청북도 제천시 · 충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7°52′∼128°22′, 북위 36°31′∼36°52′에 위치한다. 면적은 911.61㎢이고, 인구는 7만 1062명(2022년 12월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개 읍, 7개 면, 5개 행정동(11개 법정동), 218개 행정리(119개 법정리)가 있다. 시청은 경상북도 문경시 모전동에 있다.
서쪽과 북쪽에 태백산맥에서 흘러나온 소백산맥이 뻗어 내리며 북쪽의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동쪽의 태백산맥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소백산맥의 중앙부에 속하는 험준한 지역으로, 동북부는 험산준령(險山峻嶺)이 둘러 있고,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분지상(盆地狀)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부는 석회암지역으로 카르스트(Karst)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산계(山系)는 일반적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고도가 높아서 대략 700m 이상의 기복차를 나타낸다. 시의 중앙부 남쪽 오정산(烏井山, 811m)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부운령(富雲嶺, 535m) · 단산(檀山, 956m) · 조항령(鳥項嶺, 673m) · 운달산(雲達山, 1,097m) · 마전령(馬轉嶺, 946m) · 대미산(大美山, 1,115m)이 있고, 대미산에서 동쪽으로 황정산(黃庭山, 1,077m), 황정산 남쪽으로 공덕산(功德山, 913m) · 천주봉(天柱峰, 845m)이 있으며, 이들 산령(山嶺)이 형성하고 있는 산맥은 북쪽으로 이어진다.
시의 북서부에는 대미산(大美山, 1,115m)에서 시작해 포암산(布巖山, 962m) · 주흘산(主屹山, 1,106m) · 마패봉(馬牌峰, 925m) · 조령산(鳥嶺山, 1,017m) · 이화령(梨花嶺) · 갈정산(葛霆山, 991m) · 백화산(白華山, 1,064m) · 희양산(曦陽山, 998m)이 있다.
남서부에는 장성봉(長城峰, 915m) · 대야산(大耶山, 931m) · 둔덕산(屯德山, 969m) · 조항산(鳥項山, 951m) · 청화산(靑華山, 970m)이 있다.
운달산과 공덕산에서 시작되는 대하천(大下川)과 황정산에서 발원한 동로천(東魯川)이 산북면 대상리에서 금천(錦川)에 합류해 산북면 · 산양면을 관류해 영순면 달지리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남서부산지에서 발원한 양산천과 농암천은 가은천(加恩川)으로 흘러든다. 조령에서 시작되는 조령천(鳥嶺川)과 대미산에서 시작되는 신북천(身北川)은 문경읍 마원리에서 소야천(蘇耶川)에 흘러들고 마성면의 중앙부를 관류해 진남교(鎭南橋)에서 가은천과 합류해 영강(潁江)을 이룬다.
영순면과 산양면 지역에 들어서면, 주변에 띠모양의 길고 좁은 약간의 평야지대를 이루고 문경 도심지 남쪽에서 이안천(利安川)과 합류해 영순면 남쪽에서 낙동강에 흘러든다. 이 영강은 관산(觀山) · 견탄(犬灘) · 주평(舟坪) · 장평(長坪) · 영순(泳順) 들판의 농업용수로 공급되었다. 또 2018년 공장 폐쇄 전까지 문경시멘트공장의 공업용수로 공급되었다. 문경시민의 식수로도 이용되고 있다.
지질은 주로 화강암질 편마암과 이를 경사부정합(傾斜不整合)으로 덮고 있는 조선계(朝鮮系) 대석회암통이 발달되고 있으며, 여기에 관입된 화성암층에는 각종 금속 및 비금속 광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고, 동남부의 평안계와 대동계 지층에는 석탄이 매장되어 있다.
높고 험한 산세와 내륙에 위치한 까닭으로 대륙성기후의 성격이 강해 한서의 차가 큰 편이며, 연평균기온 12.0℃, 1월 평균기온 -2.0℃, 8월 평균기온 23.6℃이며, 연강수량은 1,505.3㎜이다.
문경의 초기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산북면 · 호계면 등의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음을 보아, 이 시기에는 인간의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발전을 통해 이 지역에서도 일찍부터 소국(小國: 城邑國家)이 형성되었는데, 진한의 근기국(勤耆國: 지금의 산양면)이 이곳에 비정되고 있다.
근기국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156년(아달라왕 3) 신라에 의해 계립령로(鷄立嶺路: 문경새재 북쪽)가 개통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신라 지배집단이 남하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 지역을 통과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내물왕대 이후 신라가 비약적으로 팽창하면서 이 지역도 신라의 영역에 들어가 관문현(冠文縣, 또는 高思曷伊城, 冠縣: 지금의 문경읍), 가해현(加害縣: 지금의 가은읍), 호측현(虎側縣 또는 拜山城: 지금의 호계면) 등이 설치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지방제도 개편시 이들은 각기 관산현(冠山縣) · 가선현(嘉善縣) · 호계현(虎溪縣) 등으로 개명되어 고령군(古寧郡: 지금의 상주시 함창읍)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이 때 산양면 일대는 가유현(嘉猷縣)으로 예천군에 속해 있었다.
후삼국의 쟁패기에는 이 곳 가은현 출신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세우자 이 지역은 견훤의 세력권에 들어갔으나, 뒤이은 후고구려의 남하로 인해 양대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다. 927년(태조 10) 왕건(王建)이 친히 근암성(近巖城: 지금의 산양면)을 함락시켰는데, 이 때 고사갈이성 성주(城主) 흥달(興達)이 귀부해 오자 크게 우대하였다. 이를 계기로 후백제에서 파견되어 온 관리들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의 지배체제에 들어가 관산현은 문희군(聞喜郡)으로, 가선현은 가은현(加恩縣)으로 개명되었다. 1018년(현종 9) 이들 지역은 모두 상주(尙州)의 속현으로 편입되었으며, 문희군은 뒷날 문경군으로 개명되었고, 산양현에는 감무가 설치되었으나 1180년(명종 10) 폐지되었다. 1390년(공양왕 2) 문경군에 감무가 설치되면서 가은현을 속현으로 하였다.
이후 조선 1413년(태종 13) 문경현에 현감이 설치되면서 상주 소속의 호계현이 내속하게 되었고, 8도체제가 정비되면서 신구(新舊) 경상도관찰사의 교대 장소인 교구정(交龜亭)이 이 곳에 설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문경현의 토지는 척박했으며, 풍속은 검솔(儉率)했다고 하며, 호구수는 『경상도지리지』에 의하면 161호 2,564인이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양으로 통하는 새재[鳥嶺]로 인해 적의 주력이 이 곳으로 진격해 왔는데, 이 때 이 곳의 관병(官兵)은 대구(大丘)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문경현감 신길원(申吉元)은 수십 명의 관병을 이끌고 현청을 수비하다가 패배해 적의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항거하다가 순국하였다.
임진왜란 뒤에 새재가 국방상 요새가 됨으로 인해 이곳이 계속 중시되어서, 1708년(숙종 34) 조령산성(鳥嶺山城)이 축조되었고, 1752년(영조 28)에 독진(獨鎭)이 설치되어 현감이 수성장(守城將)을 겸하다가 다음 해에 별장(別將)을 두었다.
1871년(고종 8) 이필제(李弼濟) · 정기현(鄭岐鉉) 등의 지도하에 민중항거가 일어나 지방관과 향리의 불법을 규탄했고, 1877년에는 역모사건이 일어났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시 다른 군현과는 달리 군이 되지 못했으나, 다음 해에 13도제가 실시되자 군으로 독립하였다.
1906년 동로면(東魯面)과 화장면(化莊面)을 예천군에 할양했고, 1914년 군면통폐합에 따라 산양면과 영순면(永順面)의 일부가 상주군에 편입되었다. 한편 1907년 이래 이 곳 유지들에 의해 신식학교가 설립되어 인재양성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일진회에 의해 만들어진 도천학교(道川學校)가 민폐를 많이 끼치자, 의병들이 이를 소각하기도 하였다.
또 항일의병투쟁도 활발히 전개되었는데, 팔도의병총대장 이인영(李麟榮) 및 의병대장 이강년(李康年) 등은 이 곳 출신이었다.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4월 13∼15일산북면 주민들이 갈평(葛平)장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49년 문경군의 군청 소재지가 문경면 하리에서 호서남면의 점촌리로 이전해 오자 이 지역의 발전은 급속도화되었고 그 결과 1956년 호서남면(戶西南面)이 점촌읍으로 개칭, 승격한 이래 관할 행정구역의 개편이 있었고, 1973년 문경면과 가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6년 점촌읍이 호계면 오암리의 일부를 편입해 시로 승격되자 시군이 분리되었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 석탄산업이 쇠퇴의 길로 접어들자 지역의 경제력이 크게 저하되었다. 1986년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가 중앙동에 편입되었고 1994년 충현동을 점촌동으로 개칭하였다.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되어 문경시가 되었으며 1996년 산북면 거산출장소와 동로면 수평출장소가 각각 폐지되었다.
문경은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며 산악지대가 많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삼국시대 이전의 유적 · 유물은 타지역에 비해 빈약하다. 선사시대의 유적으로는 호계면 호계리 등지에 고인돌이 있고, 유물로는 산북면 서중리에서 출토된 마제석촉이 있다. 또 삼국시대 유적으로는 호계면 호계리고분군과 문경읍 하초리고분군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산성으로는 고모산성(姑母山城) · 마고산성(麻姑山城) · 희양산성(曦陽山城) · 작성(鵲城) · 조령산성(鳥嶺山城) · 어류성(御留城) · 고부산성(姑夫山城) · 가은고성(加恩古城) · 노고성(老姑城) · 화장성(花庄城) 등이 있다.
사찰로는 587년(진평왕 9)에 창건한 대승사(大乘寺)를 비롯해 김룡사(金龍寺) · 봉암사(鳳巖寺) · 혜국사(惠國寺) · 운암사(雲巖寺) · 심원사(深源寺) 등이 있다. 불교 유산으로는 산북면 전두리의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보물, 1973년 지정), 가은읍 원북리의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2008년 지정), 산북면 김룡리의 김룡사 대웅전이 있다. 김룡사 대웅전은 2012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또 산북면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문경 내화리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가은읍 원북리의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 정진대사탑(보물, 1963년 지정) · 봉암사 정진대사탑비(보물, 1963년 지정) · 환적당지경지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 함허당 득통탑(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 봉암사석종형부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문경읍 갈평리의 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4년 지정) 등이 있으며, 이 밖에도 봉덕사지삼층석탑, 문경읍의 관음리삼층석탑 · 상리삼층석탑 등이 있다.
불상으로는 산북면 전두리에 대승사금동보살좌상(보물, 1989년 지정) · 대승사마애여래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8년 지정), 가은읍 원북리에 고려시대의 봉암사마애보살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문경읍에 문경관음리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등이 있다.
사적과 기념물로는 문경읍 상초리의 문경 조령 관문(사적, 1966년 지정)과 주흘산조령관문일원(경상북도 기념물, 1974년 지정)이 있으며, 가은읍 성저리에 문경모산굴(경상북도 기념물, 1979년 지정)이 있다.
이 밖에 국가유산으로는 교촌리 주흘산 기슭의 문경향교대성전(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5년 지정), 상리에는 옛 문경현아의 객사인 관산지관(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87년 지정), 상초리 새재 2관문 내의 조령산불됴심표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동로면 명전리에 황장산봉산표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0년 지정), 산북면 대하리에 문경장수황씨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991년 지정)이 있다.
또 영순면 율곡리에 홍귀달선생신도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문경읍 상초리에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신길원현감충렬비(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81년 지정), 산북면 대하리에 황방촌유물(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79년 지정), 박열의사 생가지(기념물, 2004년 지정)이 있다.
이 밖에도 문경읍 진안리에 사기장(중요무형문화재, 1996년 지정), 산북면 대하리에는 민속주인 문경호산춘이 있으며, 천연기념물로는 농암면 화산리의 문경 화산리 반송(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이 있고, 산북면 우곡리에는 약 가 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는 1392년(태조 1) 문경읍 교촌리에 창건된 문경향교(聞慶鄕校)가 있다. 이 향교는 임진왜란중에 소실되었으나 1598년(선조 31)에 대성전을 중건하고, 1676년(숙종 2)에 명륜당을 재건했으며, 그 뒤 여러 차례 중수하였다. 사학기구인 서재는 고상안(高尙顔)이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에 설립한 영고서재(潁皐書齋)가 있었으나 서재적 기능을 못하고 있다.
서원으로는 1544년(중종 39)에 산북면 근암리에 설립된 근암서당을 1655년(효종 5)에 근암서원(近嵒書院)으로 승격시켰으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4년에 복원하였다. 이외에도 1677년에 설립한 한천서원(寒泉書院), 1713년에 설립한 소양사우(瀟陽祠宇), 1795년(정조 19)에 설립한 능연서원(能淵書院) 등이 있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모두 훼철되었다.
서당으로는 가은읍 작천리에 옥봉서당(玉峰書院), 산북면 창구리에 창구서당(蒼邱書堂), 산양면 반곡리에 반곡서당(盤谷書堂), 호계면 견탄리에 호계서당(虎溪書堂)이 있으나 서당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
근대교육기관으로는 구한말에 세워진 것은 없으며, 1912년에 문경공립보통학교가 세워졌다. 이 학교의 전신은 1910년 4월에 설립한 경원학교를 읍내의 육영학교와 병합한 경옥학교였다.
1921년에 농암면에 농암공립보통학교가 개교한 뒤 1면 1개교 설립정책에 따라 1930년문경면에 문경공립보통학교, 산북면에 산북공립보통학교, 1934년 문경서부공립보통학교 · 영순공립학교 · 호서남공립보통학교, 1935년호계면에 호계공립보통학교, 1943년 유곡간이학교 등의 여러 학교가 세워졌다.
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48년 문경중학교, 1949년 문경농림학교, 1951년 문경고등학교, 1952년 산북중학교, 1954년 청암중학교, 1955년 동로중학교, 1956년 문경여자중학교, 1957년에는 가은중학교 등이 각각 설립되었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7개교, 중학교 9개교, 고등학교 6개교, 문경대학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도서관 4개, 문화공간으로 공연시설 3개, 박물관 2개, 지역문화복지시설 4개, 문화원 1개가 있다. 문화행사로는 1975년부터 매년 10월에 문경문화제를 개최해 각종 행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호계(虎溪)의 부곡(富谷) 농악놀이는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 고장의 민속놀이로는 석전(石戰) · 지신밟기 · 윷놀이 · 타구놀이 등이 있다. 이 가운데 문경지방의 독특한 민속놀이인 석전은 이곳 지방민의 구전으로는 고구려시대에 국가적 행사로서 임금의 관전 하에 시행되었다 한다.
마을과 마을 간이나 한 동네가 둘로 나누어져 수백 보의 거리를 두거나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돌을 던지는 놀이인데 돌을 피해 도망가는 편이 지게 된다.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서 돌을 던지다가도 분위기가 고조되면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게 되고, 끝에 가서는 육박전까지 벌이게 되는데 쌍방 모두 많은 부상자가 나게 된다.
이는 전투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연무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고려 때 우왕은 석전에 특별히 깊은 관심을 보였고, 석전놀이는 실제 전술의 하나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석투반(石投班)은 바로 전술 목적에서 생긴 전투부대이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석전은 성행했고, 삼포왜란 때는 왜구를 물리치는 데 석전술을 사용하였다. 특히 산양면 현리와 산북면 서중리 사이에 성행했고, 문경읍내 마을과 마을끼리도 했으나 근년에는 이 놀이가 없어졌다.
이 고장에서는 산과 관련된 여러 가지 동제를 지낸다. 정월대보름날에 각 동리별로 주민들이 모여 연중무병 · 평온무사 · 풍년 등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내며, 제관선정 · 금기사항 · 제차 등은 다른 지방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고장은 산악지대여서 다른 지방보다는 산과 관련된 것이 많다는 특색이 있다.
고개마루에 있는 신목(神木)이나 돌더미가 신체인 경우가 많으며, 산신제로서 동제를 지내는 곳도 많다. 문경새재는 영남지방의 선비들이 한양에 과거 보러 가던 길목에 있어서, 길목 · 고개마루 등에 성황당을 만들고 나그네가 돌을 하나씩 쌓음으로써 여행의 피로도 풀고 복을 빌기도 했던 것 같다.
산북면 우곡리 등지에서는 현재도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산신제의 대상은 주로 호랑이를 신격화해 산신당 또는 산신각을 짓고 거기에 모셔 제를 지낸다. 이곳은 대부분이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산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산에 대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산신제는 대개 정초에 지내며 거의 모든 마을에서 동제가 끝나면 동민이 모여 음복을 나눔으로써 공동체의식을 고양한다.
이 고장에 전승되는 설화로는 인물에 관한 것이 많은데, 그 중에서 최명길(崔鳴吉)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이야기와 가은읍 갈전리 아차동의 견훤의 출신지에 관한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문경새재 성황신과 최명길에 얽힌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최명길이 소년시절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길에 새재를 지나게 되었을 때 일어난 이야기이다. 새재에 이르자, 웬 젊은 여인이 그의 뒤를 따라오면서 혼자 가기가 무서우니 같이 가기를 요청해 오자 이를 쾌히 승낙하고 동행하게 되었다. 최명길은 그녀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 여자가 이를 눈치채고 방긋 웃으면서, “저는 사람이 아니라 새재 성황신이온데,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서울에 갔다오던 길에 성황당 앞을 지나면서 성황당에 걸려 있는 치마를 보고 욕심을 내어 이를 훔쳐다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인데 우연히 공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을 하였다.
최명길은 속으로 몹시 놀랐으나, 태연자약하게 “인명은 재천인데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일 것까지 없지 않느냐?”고 타이르니, 성황신이 다시 “공은 멀지 않아 정사공신(靖社功臣)으로 영의정에 오를 분이시며, 병자호란에 큰 공을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망하게 되고 청나라가 흥할 것이니 부디 청나라와 화친해 이 나라 사직을 보전해야 합니다. 오늘 좌수의 딸을 죽일 것이나, 공의 체면을 보아 징벌하는 것으로 대신할 것이니, 공은 이러이러하게 해 제 체면을 세워 주십시오.”라고 말을 한 뒤 사라졌다. 최명길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서둘러 안동 좌수댁을 찾으니 좌수의 딸이 급사해 집안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이에 주인을 찾아 인사를 차리고 나서 딸을 살려주겠다고 말한 뒤 딸의 방으로 갔다. 새재에서 보았던 성황신이 좌수 딸의 목을 누르고 있다가 공을 보고 반기면서 “이제야 오십니까?” 인사를 하였다. 성황신과 최명길이 대화하는 것을 집안식구들이 들을 수는 있었으나 보이지는 않았다. 최명길이 좌수에게 성황당에서 가져온 치마를 불사르게 하고 깨끗한 음식으로 제수를 갖추어 제사를 지내게 했더니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그 뒤 최명길은 벼슬이 자꾸 올라 영의정이 되었으며, 병자호란을 당해서는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정세를 잘 판단해 치욕을 참고 화청정책을 써서 국난을 수습하게 되었는데, 성황신과의 인연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전한다.
가은읍 갈전리 아차동의 견훤의 출신지에 관한 이야기는 이곳에 밤마다 몰래 찾아드는 초립동과 동침 끝에 처녀가 잉태를 해 낳은 아이가 견훤인데, 어느 날 초립동이 찾아오자, 부모가 시키는 대로 몰래 초립동의 옷끈에 아주 긴 실을 매어놓았다가 날이 밝아 실을 따라가 보았더니 금하굴에 커다란 지렁이가 있더라는 내용이다.
이 밖에도 용과 관련된 전설과 자리를 짜던 「빈지못터이야기」, 침을 놓던 「동침마이야기」, 그리고 영강에는 까치소 · 송진소의 이시미(이무기)에 관한 전설 등이 많이 전하고 있다.
이 고장의 민요는 주로 노동요와 동요 · 주무요(呪巫謠) · 유희요 · 유흥요 등이 불렸다. 노동요에는 주로 남요(男謠)로서 「모심기노래」 · 「논매기노래」 · 「보리타작노래」가 있고, 부요(婦謠)로는 「베틀노래」 · 「삼삼기노래」 등이 있으며, 동요로는 「꿩노래」 · 「기러기노래」 · 「꼬리따기노래」 등이 불렸다.
주무요로는 「지신밟기」 · 「성주풀이」 · 「지짐노래」 · 「행상소리」 · 「달구질(封墳, 다지기)노래」 등이 있고, 유희요로는 「달강노래」 · 「자장가」 등이 있으며, 유흥요로는 「새재노래」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노래들은 혼자 부르는 노래와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로 구별할 수 있다. 혼자 부르는 노래는 주로 부요나 유흥요의 경우이고,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는 노동요의 남요나 주무요 등으로 선소리나 메김소리를 받아 뒷소리로 부르게 되는데 이것을 반복해 부른다.
이 지방에서 전래되는 독특한 노래로는 「새재노래」 · 「보리타작노래」 · 「달강노래」등이다. 「새재노래」는 아리랑의 후렴을 수반해 아리랑요의 일종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노래는 향민이 즐겨 불러오던 노래로 그 내용의 일부는 “문경새재 물박달나무/홍두깨 방맹이로 다 나간다/홍두깨 방맹이 팔자 좋아/큰애기 손질에 놀아난다/문경새재 넘어갈제/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문경새재 덕무푸리 말최쇠최로 다 나간다/문경새재 박달나무/북바듸집으로 다 나간다/황백나무 북바듸 잡은/큰아기 손목이 다 녹아난다…….”로 되어 있다.
「보리타작노래」는 이 지방에서 보리를 거두어들여 도리깨타작을 할 때 마주 서서 도리깨질을 하면서 서로 주고받으며 부르는 일종의 노동요이다. 그 내용의 일부는 “밀양의 바람이 디리 불어/아전의 관밑에 도리대는 공단갓끈이 지직일레/양산통골 큰절 뒤에는 아르베기 처자가 디리 눗네/소상네 절구경 할라들랑 금강산 모리로 돌아오소/요게나 때리소/봉해야 조게나 때리소/봉해야 물푸레나무/도루깨 장치가 꼴딱꼴딱 잘 넘어간다/요게나 때리소/봉해야 조게나 때리소/봉해야 해넘어간다/봉해야 요게나 때리소/봉해야…….”로 되어 있다. 토속적이면서도 특히 영남의 민요율격을 벗어난 것이 특징적이다.
이 고장의 민요는 향토색 짙은 내용을 특징으로 간직해 불려왔으나, 요즈음 구전의 형태를 빌려 전래, 계승되지 않고 있어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밖에도 「노리개노래」 · 「달노래」 · 「주머니노래」 · 「윷노래」 등이 전한다.
산악지역에 위치해 대부분이 산지로 되어 있어 경지면적은 전체의 약 14.7%에 지나지 않는다. 경지면적은 1만 1230㏊이며, 이 중 논이 6,115㏊로 약 55%를 차지하고 밭은 5,115㏊로 약 45%로 논농사가 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논농사는 금천 · 조령천 · 영강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농경지에서 이루어지며, 밭농사는 주로 저산성구릉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콩 등의 잡곡과 담배 · 참깨 · 들깨 · 땅콩 등의 특용작물이며, 작약 · 지황 등의 약용작물도 생산되는데, 요즈음에는 성인병의 치료로 수효가 많아 누에치기를 약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오이 · 수박 · 참외 · 호박 등의 소채류와 사과 · 배 · 복숭아 · 포도 · 감 등의 과실류의 생산량 증가가 두드러진다.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한 산간지대는 사과 생육에 가장 이상적인 기후조건과 반 세기에 걸친 재배기술의 축적으로 특히 당도가 높고 저장성이 강한 고품질의 사과를 생산한다. 그리고 취나물 · 다래순 등의 산나물과 품질이 우수한 무공해 영지버섯과 송이버섯이 유명한데, 특히 송이는 질(質)에 있어 매우 우수해 거의 전부가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축산은 한우 · 젖소 · 돼지 · 사슴 · 개 · 닭 등이 사육되고 있으며, 양봉(養蜂)은 경제성이 있어 조금씩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2008년 현재 임야면적은 68,913㏊로 전체면적의 약 75.6%이며 목재생산이 많은 편이나 광산용 침목 등 산업용재의 소비급증으로 보다 많은 유용재의 생산이 시급한 실정이다. 입목축적은 1999년의 312만 7,813㎥에서 2008년 568만 7,535㎥로 증가했다.
많은 지하자원을 갖고 있는 천혜의 보고(寶庫)로 한일합병 이후부터 활발히 개발되기 시작한 광업은 오랫동안 이 고장의 경제를 선도해 온 주종산업(主宗産業)이었다.
매장되어 있는 광물로는 철 · 동 · 아연 · 납 · 창연 · 휘수연 · 중석 등의 금속광물과 석회석 · 형석 · 활석 등의 비금속광물이 있으며, 평안계(平安系)와 대동계(大同系)에 각각 수매의 협탄층(狹炭層)이 발달되어 있다. 주로 규석은 산북면, 석회석은 호계면, 장석은 가은읍 · 동로면 · 농암면, 석탄은 가은면 · 농암면에서 산출된다.
1999년 가행광구 8개, 미가행광구 50개, 총 58개 광구수인데 비해, 2008년 현재 광구수는 모두 47개이며 이중 가행(稼行)중인 것은 16개이고 나머지 31개는 미가행중으로 점점 감소 추제를 보이고 있다. 생산량은 1999년 22만 1,534톤에서 2004년 현재 8만 6,265톤으로 크게 감소했다가 규석 생산량의 증가에 힘입어 2008년에는 26만 2,850톤으로 증가했다. 시의 급성장은 석탄광업과 깊은 관계가 있으나 생산량이 줄어들어 1985년부터 정부에서 시행해 오고 있는 석탄산업합리화 사업의 적용대상이 되어 조만간에 전 광산이 폐광될 것으로 전망되어 대체산업의 조속한 육성이 요망되고 있다.
산업으로는 농공단지가 산양, 마성, 가은, 영순에 4개의 단지가 구성, 총 42업체가 입주해있다. 제조업이 수나 규모에 있어 영세하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는 이루지 못하고 있으나, 전통적인 제조업으로는 도자기 · 한지(韓紙) · 호산춘(湖山春) · 청려장을 들 수 있다. 문경도자기는 1960년대 우리 나라에서는 막그릇이라 불리는 일본의 국보인 ‘이도챠왕’을 재현해 유명해졌다. 도자기공업은 문경읍 진안리 · 관음리 · 갈평리 일대에서 활발한데, 이는 적토 · 백토 · 사질점토 · 도석 등의 원료와 좋은 수질, 쉽게 구할 수 있는 화목(火木) 덕택으로 주로 다완류와 술병 · 화병 · 화분류가 생산된다.
한지는 산북면의 김룡사에서 만들었던 김룡한지(金龍韓紙)와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에서 만들어지던(雲川韓紙)가 있었는데, 현재는 운천한지만이 생산을 하고 있다. 한편 호산춘이란 술은 산북면 대하리의 장수황씨(長水黃氏) 문중에서 전해져 오던 가주(家酒)로서 지금부터 200년 전 황의민(黃義民)이란 사람이 자기 호(號)인 호산(湖山)과 춘정(春情)을 느낀다는 춘자(春字)를 합쳐 이름 지은 것이며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황갈색을 띠며 향이 독특해 부드러우면서도 짜릿한 맛이 난다. 청려장은 효자가 부모님께 드린다는 효도지팡이인데 수공으로 가공해 가볍고 단단하다.
상업은 『임원경제지』와 『동국문헌비고』에 의하면 1770년대에 송면장(松面場)을 비롯해 3개의 5일장이 있었고 『경상도읍지』에 의하면 1830년대에는 읍내하(邑內下) 및 유곡장(幽谷場)이 2 · 7일, 송면 읍내상장(邑內上場)이 4 · 9일, 농암장(籠巖場)이 5 · 10일에 열렸다.
1895년에 진남(鎭南)의 1 · 6일, 호남(戶南)의 3 · 8일장이 있었는데 곡물류 및 채소류와 가축이 거래되었다. 지금은 문경장이 2 · 7일, 가은장이 4 · 9일, 동로장 3 · 8일, 농암장 5 · 10일에 각각 열리는데 곡물류와 임산물 · 약초가 주로 거래된다. 그러나 시장의 기능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데 주면지역의 문경 · 가은 등지의 상설시장이 번창 · 활발하다.
교통은 도로의 국도가 점촌에서 예천과 상주로 갈라지며, 그 외에도 지방도가 각 면에 연결되어 있어 교통의 요지이며, 철도는 기천 · 점촌 · 영주로 연결되는 경북선과 점촌 · 문경을 연결하는 문경선이 점촌에서 분기된다. 국도와 같이 점촌에서 분기되어 예천과 상주로 통해 있다.
쌍룡계곡은 농암천 상류쪽 도장산 기슭 4㎞ 구간에 펼쳐진 계곡으로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용추에서 청용, 황용이 살았다 하여 쌍룡계곡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용추계곡은 용추폭포와 월영대 등 유명한 명소를 포함하고 있는 계곡으로 가은읍 완장리에 위치하며, 충청북도 괴산군과 경상북도 문경시의 경계를 이루면서 소백산맥 고지에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채 깊 사계절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다. 선유동계곡은 전국에서 선유동으로 이름붙여진 명승지 증 으뜸인 곳으로 하상에는 대리석을 깔아놓은 듯 하얀 암반이 펼쳐져 있고 아홉 구비로 나뉘어져 선유구곡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정취를 잘 간칙하고 있는 곳이다. 골짜기마다 한여름에도 손을 담그면 얼음덩어리를 띄워 놓은 듯 차가워서 냉골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운달계곡은 수령 300년이 넘는 전나무 숲속이 조각품 마냥 운치를 더해주어 더욱 유명하다.
조령계곡은 백두대간의 조령산을 넘는 조령새재가 있는 곳으로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으며,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봉암사 백운대계곡은 봉암사 내에 위치한 계곡으로 옥석대라고도 불리우며, 봉암사의 목탁소리와 울창한 숲, 맑은 물이 어우러져 평온한 곳으로 금강산 막폭동에 버금가는 곳으로 유명하다. 진남교반은 문경의 유명한 광산이었던 문경탄광을 끼고 있는 곳으로 마성면 신현리에 속한다. 이 곳은 금강산을 방불케 한다고 하여 문경의 소금강으로 불리운다. 경천호반은 낙동강 지류인 금천을 막아서 만든 전형적인 계곡형 저수지로 맑은 물과 수려한 경관으로 유명하며 댐이 조성된 이후 수량이 풍부하여 낚시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여기까지 언급한 총 8개의 명승지를 문경8경이라 부른다.
또한 문경시는 과거의 활발함을 잃어버린 폐광과 탄광촌에 새로운 체험관광지를 개발하여 주목받고 있다. 산악 지형을 이용한 사계절썰매장, 계곡을 이용한 레프팅, 폐광 지역을 활용한 철로자전거 등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특색있는 아이템으로 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고 있다.
문경시는 사극 드라마 제작에 협조하여, 개발로 인해 오염되지 않는 아름다운 자연환경들을 드라마 촬영지로 개발한 한편, 그 이후에도 인기 드라마 촬영지를 유지 · 관리하여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대표적인 드라마 촬영지로는 가은읍에 연개소문(SBS) 촬영지, 문경읍에 태조 왕건 · 제국의 아침 · 무인시대(KBS) 촬영지가 있다.
문경시가 개최하는 축제로는 전통차를 테마로 하여 관광객들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문경한국전통찻사발축제, 문경 지역의 명산들을 아울러 산악관광지로 거듭나기 위한 문경마운틴페스티벌,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더불어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과거길달빛사랑축제. 문경시의 특산물인 오미자를 활용한 문경오미자축제 등이 있다.
시의 서부에 위치한 읍으로 면적 152.44㎢, 인구 4,077명(2022년 12월 현재). 읍 소재지는 왕릉리이다. 본래 관문현(冠文縣) · 관산현(冠山縣) · 가해현(加害縣)으로 칭해 오다가 750년경에는 고령군(古寧郡)에 예속되었고 1020년경에 가은현(加恩縣)이라 개칭해 상주군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문경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909년에는 가동(加東) · 가북(加北) · 가현(加縣) · 가남(加南) · 가서(加西) 등 5개 면이 가동(加東) · 가북(加北) · 가현(加縣)으로 폐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3개 면을 통합해 가은면이 되었다. 1963년에 농암면의 민지리를 편입하고, 1973년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편입해 읍으로 승격되었다.
소백산맥의 동남사면에 위치해 북서쪽은 소백산맥의 뇌정산(雷霆山, 991m) · 희양산 · 시루봉(甑峰, 915m) · 둔덕산, 동남쪽에 어룡산(魚龍山, 583m) · 작약산(芍藥山, 763m) 등이 둘러싸인 산간분지이며, 분지의 낮은 지대는 석회암으로 되어 있다.
영강의 상류부로서 시가지의 남단에서 소하천이 합류하며, 낙동강 상류를 이루고 있다.
총경지면적 15.86㎢로 10.4%, 임야면적 128.52㎢로 84.3%, 기타 5.3%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8.18㎢로 51.6%를 차지하고, 밭이 7.68㎢로 48.4%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대부분의 지역이 임야로 되어 있어 경지율이 낮은 편이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와 특용작물로 잎담배의 생산이 많다. 양봉과 토끼 · 닭 · 사슴 · 개 · 산양 등의 사육도 활발하다. 지하자원으로는 석탄과 장석 생산이 활발하다. 교통은 마성 · 용암 · 함창을 잇는 지방도와 국도가 연결되며, 철도는 가은선의 종점으로 문경선을 통해 경북선과 연결되어서 산업철도의 구실을 한다.
문화유적은 원북리에 봉암사가 있으며, 완장리의 선유동은 충청북도 괴산군의 선유동과 함께 소백산맥으로 분리되어 있는 비경으로 1㎞에 달하는 9곡의 계곡으로 유명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읍으로 면적 156.66㎢, 인구 6,915명(2022년 12월 현재). 읍 소재지는 상리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문경은 정치 · 군사 · 교통 · 문화의 중심지로서 현아의 소재지였고, 신라시대에는 관산현(冠山縣)에 속했으며, 고려 초에 문희(聞喜), 고려 말에 문경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초곡면(草谷面)과 읍내면(邑內面)을 병합해 문경면이 되었으며, 1932년신북면(身北面)을 병합했고 1973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후 1996년에 개발촉진지구, 폐광지역진흥지구로 지정되었고, 1998년에는 문경새재를 자연생태공원으로 지정하였다.
북서쪽의 소백산맥은 충청북도와 분수령이 되며, 주흘산 · 대의산(大義山, 1,110m) 등이 있어서 교통에 방해가 된다. 조령 · 하늘재 등이 있어서 영남의 관문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이화령을 통하는 국도의 개통으로 남북 간 교통이 편리하여졌다. 산간에서 발원하는 신북천은 동남으로 흘러 조령천에 흘러든다.
총경지면적 14.65㎢로 9.4%, 임야면적 130.93㎢로 83.6%, 기타 7.0%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7.00㎢로 47.8%를 차지하고 밭이 7.65㎢로 52.2%를 차지해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경지율이 낮으며,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외에 최근에는 배수가 잘 된 하천연안에 사과원의 개발로 사과가 생산되며, 재래종 감이 많이 생산된다.
무와 배추의 생산량은 증가했고, 한우와 양봉이 행해지고 있다. 여러 개의 무연탄광이 고요리에 있으며, 또한 도자기의 원료인 적토 · 백토 · 사질점토 등이 생산되어 예로부터 요업이 발달했으며, 생산된 도자기는 국내판매는 물론이고 외국에 수출되는 인기품으로 각광을 받는다. 최근에는 새재도립공원내 KBS태조왕건촬영장, 주흘산, 문경활공랜드, 문경온천개발, 폐광지역진흥지구, 개발촉진지구 지정 등 개발여건 조성으로 지역경제가 다소 활성화되는 추세이다.
교통은 산업철도로서 문경선이 경북선에서 분기하며, 도로는 북쪽의 이화령을 지나 충청북도와 연결되며, 남쪽은 경상북도 북부지방으로 연결된다. 문화유적은 조령관문 · 혜국사 · 고모산성 등이 있다. 진남교 부근 일대는 경치가 아름다워 유원지로 개발되어 각광을 받고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3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103.47㎢, 인구 2,597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농암리이다. 신라 및 고려 초에는 가은현에 속했던 지역으로 고려 말 공양왕(1390년경) 때 문경현에 병합되어 가서면(加西面)과 가남면(加南面)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 문경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가서 · 가남을 통합하고, 갈동(葛洞)에 있는 농바우의 이름을 따서 농암면이 되었다. 이후 1995년문경시 농암면으로 개칭되었다.
조항산 · 청화산 · 도장산 · 중산 · 칠봉산(七峰山, 600m) 등이 면계에 있다. 면내에서도 시루봉 · 연엽산(蓮葉山, 775m) 등의 높은 산이 많다. 산지 사이를 농암천과 관기천(官基川)이 동서로 흐르면서 하천을 개석해 농암리 부근에 큰 충적평야를 발달시켰다.
총경지면적 11.98㎢로 11.8%, 임야면적 86.61㎢로 83.8%, 기타 4.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5.73㎢로 47.8%를 차지하고 밭이 6.25㎢로 52.2%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 등이 있으며, 특용작물로 엽연초, 배추, 오이가 재배되고, 양돈 · 사슴 · 산양 · 닭 등의 축산업을 하고 있다.
진남교반으로 흘러드는 농암천 주변에는 수석간판이 즐비하며, 수석산지로 유명하다. 광산물로는 장석이 생산된다. 교통은 도로가 농암리를 중심으로 북동쪽으로 가은읍 · 문경읍과 연결되고 남서쪽으로는 상주시와 연결된다. 유적으로 조항산 불당곡에는 조선 중기까지 절이 있었으나 폐허가 되어 지금은 기왓장만 발견되고 있다.
화산리에는 천연기념물인 반송이 있는데, 이 반송은 한 뿌리에서 여섯그루의 소나무가 솟아 있어 일명 ‘육송’이라고 한다. 종곡리에 속리천과 농암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1㎞에 걸쳐 수령 200∼300년 된 아름드리 노거송들이 시원한 강물과 우아한 산세에 어우러져 있는 대정공원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142.10㎢, 인구 2,063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적성리이다. 신라시대에는 난산현(蘭山縣), 경덕왕 때 안인현(安仁縣), 고려시대까지는 작성현(鵲城縣)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예천군 동로소면(東老所面)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문경군에 편입되어 동로면이 되었다. 이후 1932년에 산북면을 병합(경상북도 훈령 제33호)하고 1963년 수평출장소를 설치하였으며, 1995년에 문경시 동로면으로 통합되면서 1996년에는 수평출장소 폐지되었다.
문수봉(文繡峰) · 공덕산(功德珊13m) · 국사봉 · 매봉(865m) 등이 면계에 있으며, 면내에는 황정산(皇庭山, 1,077m) · 천주봉(天柱峰, 836m) 등의 높은 산이 대부분의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문수봉에서 발원하는 금천은 면의 중앙부를 곡류하면서 남류하고, 양안에는 좁은 평야와 하안단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높은 산이 많아 경지면적이 적다.
총경지면적 12.08㎢로 8.5%, 임야면적 124.72㎢로 87.3%, 기타 4.2%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92㎢로 40.7%를 차지하고 밭이 7.16㎢로 59.3%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좀더 높은 비중을 보인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와 특용작물로 잎담배 · 고추 · 약초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양봉이 활발하다. 영지버섯이 유명하며 광산물로는 장석이 산출된다.
교통은 낙동∼단양간의 지방도가 면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으며, 동로∼괴산, 동로∼예천 등지로 통하는 군도가 있다. 유적으로는 공덕산에 변승사가 있다. 동족마을로는 마광리에 경주손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중앙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75.09㎢, 인구 3,565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모곡리이다. 신라 중기까지 관문(冠文) · 관산(冠山)이라 불리던 지역이며 고려 때에는 문희현(聞喜縣) · 문경현(聞慶縣)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남면(身南面)과 신동면(身東面) 등 2개 면이 병합되어 마고성면(麻姑城面)으로 개칭했다가 1916년마성면으로 되었다. 1958년에는 신현1리에서 현 소재지로 청사 이전하였다가 1989년에 현 청사 신축하였다.
중앙 저지대를 제외한 면의 대부분은 산지로 되어 있으며, 백화산 · 옥녀봉 · 봉영산 · 오정산(烏井山, 810m) · 어룡산(魚龍山, 583m) · 뇌정산(雷霆山, 901m) 등의 산이 면의 경계를 둘러싸고 있고, 면내에는 성주산(聖主山, 713m) · 능곡산(陵谷山, 571m) 등의 높은 산이 있다. 조령천(鳥嶺川)이 이들 산지를 양분하면서 남류하고 영강에 합류하는데 연안에는 상당한 평지가 있다.
총경지면적 10.08㎢로 13.5%, 임야면적 58.10㎢로 77.7%, 기타 8.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63㎢로 45.9%를 차지하고, 밭이 5.45㎢로 54.1%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좀더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주요 농산물로는 쌀 · 보리와 사과 · 감 등이 많이 생산된다. 한우 · 젖소 · 돼지 · 사슴 · 개 · 산양 · 토끼 등의 가축사육도 이루어진다.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한때는 지역주민의 80∼90%가 광업에 종사하였으나 1991년 (주)도투락 봉명탄광을 끝으로 광산이 모두 폐광되었고 이에 대한 대체산업으로 1992년∼1993년도에 마성농공단지를 오천리에 조성하여 현재 15개업체가 입주 가동중에 있으며 현재는 폐광지역 경제활성화를 위한 대체산업 유치에 부응하여 정부출연기관인 석탄산업합리화 사업단 및 문경시의 공공자금과 민간자본 등 총 600억을 투자한 31만평규모의 문경골프장 조성사업이 외어리 일원에 본격 추진중에 있어 경쟁력 있는 첨단산업 및 농업의 육성과 함께 관광 문경건설에 노력하고 있다.
교통은 문경선과 사천∼초산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남북으로 통과하고 김천∼마성간의 지방도가 모곡리에서 북동 · 남서방향으로 갈라지며, 가은선(가은∼불정)이 남부의 면계를 따라 있어서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신현리에 고모산성의 성지가 남아 있는데 구한말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이 이끄는 의병이 수백 명의 왜병을 사살한 전과를 올린 곳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111.27㎢, 인구 2,729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대상리이다. 신라 전기에는 근품현(近品縣)에 속했고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750년) 때까지는 가유현이라 했으며 1020년(현종 11)에는 산양현이라 불리면서 상주군에 속했으나 1912년문경군에 이속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예천군 화장면(化庄面) 일부를 편입하면서 산북면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에 거산출장소가 설치되었고, 이후 1995년에 점촌시와 문경군 통합으로 문경시 산북면으로 개칭되면서 1996년에 거산출장소가 폐지되었다.
운달산 · 단산 · 공덕산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면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이다. 금천의 상류와 그 지류가 남쪽으로 흐르며, 상류부에서는 좁은 산간분지를 형성하고, 하류부에서는 좁은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있다.
총경지면적 16.23㎢로 14.5%, 임야면적 88.00㎢로 78.7%, 기타 6.8%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8.48㎢로 52.2%를 차지하고, 밭이 7.75㎢로 47.8%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등이며, 특용작물로는 사과, 호산춘, 송이, 영지버섯, 인삼 등이 생산된다. 한우 · 돼지 · 산양 등의 가축사육이 이루어지며, 양봉도 많이 한다. 대하리에는 민속주인 호산춘이 특산물로 유명하고 분재소재목, 도자장신구 등도 특산물로 주목받고 있다.
교통은 낙동∼단양간 지방도가 북동 · 남서방향으로 통과하며 대하∼가좌, 영순∼산북간의 군도가 면의 북부 · 남동부를 통과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서중리에 근암서원, 김룡리에 김룡사, 전두리의 사불산(912m)에는 사불암과 목각탱화 · 관계문서가 있는 대승사가 있다. 내화리의 화장사지(花莊寺趾)에 삼층석탑이 있다. 동족마을로는 서중리에 안동권씨 · 안동김씨 · 전주이씨, 대상리와 대하리에 장수황씨, 내화리에 반남박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남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32.64㎢, 인구 3,060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불암리이다. 신라 중기까지 근품현(近品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는 가유현(嘉猷縣)이라 개명해 보주(甫州 · 예천)에 속했으나 고려 현종 때 상주군에 이속되어 산양현이라 개칭했다가 고려 명종 때 감무가 폐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주군 일부와 예천군 화장면(花庄面) 일부를 병합해 산양면이 되어 문경군 관할로 편입되었다. 1973년호계면 봉정리가 편입되면서 16개 리동(里洞)이 되었고, 이후 1995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문경시 산양면으로 개칭하였다.
왕의산(王衣山, 336m) · 오봉산 · 비조산 등을 잇는 산릉이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으나, 면의 대부분이 100m 내외의 구릉지와 평지가 교차하면서 분포한다. 서쪽에는 영강, 동쪽에는 금천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흘러들며, 양하천유역에는 충적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총경지면적 14.60㎢로 44.7%, 임야면적 11.82㎢로 36.2%, 기타 19.1%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10.00㎢로 68.5%를 차지하고 밭이 4.60㎢로 31.5%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경시 산하 면 가운데 경지율이 가장 높아 주로 쌀 · 보리를 수확하고 있으며, 상황버섯, 표고버섯 재배와 한우사육도 많이 하고 있다. 그 외 젖소 · 사슴 · 개 · 닭 · 오리 등의 사육도 이루어진다. 신전리에서는 고등원예작물도 재배해 소득을 올리고 있고, 반곡리 백동마을은 과수재배, 우본리 송계마을에서는 싸리나무를 이용한 바구니 · 채반 · 발 등의 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교통은 당진∼영덕간의 국도와 경북선이 면의 남부를, 낙동∼단양간의 지방도가 동부에서 남북으로 각각 통과하며, 유곡∼호계, 영순∼산북간의 군도도 있어 편리하다. 봉우재마을의 비조산 뒷봉은 옛날 봉화를 올리던 곳이다. 동족마을로는 현리에 인천채씨, 신전리에 개성고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남동단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38.55㎢, 인구 2,445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의곡리이다. 신라시대에는 남면임하(南面林下) 또는 영순부곡(泳順部曲)이라 불리다가 고려 원종 때 태금취(太金就)라는 장군이 임하촌(林下村) 출신으로 몽고군과의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해 부곡(部曲)에서 현(縣)으로 승격시켜 상주에 예속되었다가 조선 초에 상주목(尙州牧) 영순면으로 호칭되었다. 조선 순종 때 문경군에 예속되었고 1892년(고종 32)에 일시 용궁의 서면(西面)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궁 서면의 일부와 함창(咸昌) 동면(東面)의 일부를 병합하였다. 이후 1989년에 현 청사가 준공되었고, 1995년에 점촌시와 문경군이 통합되면서 문경시 영순면으로 개칭되었다.
천마산이 있는 남동부를 제외하면 면의 대부분이 100m 내외의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면의 남서부를 영강이 곡류하며, 남동단에서 면의 동계를 따라 흐르는 낙동강과 합류한다. 북동부에는 낙동강의 범람원이 발달되어 있다.
총경지면적 14.74㎢로 38.3%, 임야면적 16.58㎢로 43.0%, 기타 18.7%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10.47㎢로 71.0%를 차지하고, 밭이 4.27㎢로 29.0%를 차지하며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 · 보리 · 사과 · 수박 · 오이 · 양파 등이며, 미곡 위주의 영농으로 미곡 생산량이 많은 편이다. 온화한 기후에 인심도 순박하고 좋으며 문경 제2곡창지대로 알려져 있으며, 젖소사육도 활발하다. 최근에는 전국 최대의 표고버섯 생산 재배단지를 목표로 노력하고 있다. 달지리의 달늪은 농산물 집산지로 옛날 낙동강 소금배가 이 곳까지 거슬러 올라와서 문경 · 예천지방에 소금을 공급했던 곳이다.
교통은 낙동∼단양간의 지방도가 면의 동부를, 영순∼산북간의 군도가 각각 통과하고 있다. 사근리에는 신섬(申暹)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무림정사(茂林精舍)가 있고, 말응리 물탕거리마을 앞산 중턱 약수탕물은 마시면 벙어리가 말을 하고 나환자는 병을 고친다는 말이 전해져, 1945년경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동족마을로는 율곡리에 부림홍씨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가 있다.
시의 중앙부에 위치한 면으로 면적 53.26㎢, 인구 2,486명(2022년 12월 현재). 면 소재지는 막곡리이다. 신라시대에 호측현(虎側縣) 또는 배산성(拜山城)이라 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호계현으로 개칭, 고령군(古寧郡)에 예속시켰다. 고려 현종 때 상주군에 속했으며, 1413년(태종 13)에 문경현이 합속되어 호현방(戶縣坊)이라 불리다가 그 뒤에 호현내면(戶縣內面)이라고 호칭되면서 견탄(犬灘) · 주평(舟坪) · 굴암(窟巖) · 우로(牛老) · 호계(虎溪) 등 5개 이를 관할하게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상주군에 속했던 산서면(山西面)과 산남면(山南面) 일부를 병합, 문경군이 되면서 호계면이라 개칭하였다. 1973년봉정리(鳳亭里)를 산양면으로 이관시키고 1986년점촌시에 주평리가 이관되었다.
면의 대부분이 오정산(烏井山, 810m) · 부운령 등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남서의 일부지역에서만 영강이 흘러 낙동강에 흘러들고, 연안에는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경지로 이용된다.
총경지면적 8.79㎢로 16.6%, 임야면적 40.30㎢로 76.0%, 기타 7.4%로 이루어져 있다. 경지 중 논이 4.45㎢로 50.6%를 차지하고, 밭이 4.34㎢로 49.4%를 차지하며 논농사와 밭농사가 비슷한 비율로 행하여진다. 주요 농산물로 쌀 · 보리와 특용작물로는 잎담배 등이 생산되며, 젖소 · 돼지 · 개 · 토끼 · 닭 등의 사육과 양봉도 많이 한다. 또한 광산물로는 석회석이 많이 생산된다. 교통은 막곡리를 중심으로 문경∼안동간의 국도가 지나고 있으며, 면내에 부곡리와 탄광지역 간의 군도가 있어 편리하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그리고 시의 유일한 대학인 문경대학교이 소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