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과는 조선시대 노인을 우대하여 실시한 특별 과거로 '기로 정시(耆老庭試)', '기로 응제시(耆老應製試)'라고도 한다.
1756년(영조 32) 대비(숙종의 제2계비인 인원왕후)의 칠순을 기념하여 처음 시행되었으며, 조선시대 동안 영조 대 5회(1756‧1763‧1769‧1772‧1776년), 철종 대 1회(1854년), 고종 대 3회(1877‧1888‧1890년) 시행되었다. 나이 제한은 60세 이상을 기본으로 하되 과거 때마다 품정(品定)하였다. 1756년의 기로 정시는 응시자의 나이를 60세 이상으로 하였고, 1763년(영조 39) 영조의 칠순을 기념하는 기로 정시와 1769년(영조 45)의 기로 정시는 70세 이상으로, 1772년(영조 48)과 1776년(영조 52)의 기로 정시는 60세 이상으로 하였다. 1854년(철종 5)의 기로 정시는 대왕대비(순조의 왕비 순원왕후)의 탄신 월을 기념하여, 대왕대비의 나이인 66세를 기준으로 하여 그 이상인 자가 응시하도록 하였다.
고종 대의 기로과는 1877년(고종 14) 대왕대비(익종의 왕비 신정왕후)의 칠순을 기념하여 응시 나이를 70세 이상으로 하였다. 이후 두 번의 기로 응제 모두 대왕대비의 나이를 기준으로 하였다. 1888년(고종 25)의 기로 응제는 81세 이상 응시하도록 하였고, 1890년(고종 27)의 기로 응제는 83세 이상이 응시하도록 하였다.
기로과는 철종 대까지는 문‧무과를 병설하였으나, 고종 대는 문과만을 시행하였다. 문‧무과 모두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당락을 결정하고 당일에 급제자를 발표하였다. 급제자의 수는 실시할 때에 정하였는데, 문과는 2∼6인을 선발하였고, 무과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을 선발하였다. 급제자들의 경우 각 과 장원(壯元)이나 합격자 전원에게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주는 등 매우 우대하였다.
1756년의 기로 정시에서는 창경궁 춘당대(春塘臺)에 60세 이상의 노인을 모으고 왕이 몸소 나와 문 · 무과의 과거를 치렀다. 문과에 이가우(李嘉遇) 등 6인을 뽑고, 무과에 이명한(李鳴漢) 등 42인을을 뽑아 문 · 무과의 장원에게 통정대부를 제수하였다. 1763년은 영조가 70세가 되는 해이자 즉위한 지 40년이 되는 해이므로, 대증광시(大增廣試)를 실시한 뒤 기로 정시를 실시하였다. 문과에 이종령(李宗齡) 등 5인을, 무과에 이지홍(李枝弘) 등 86명을 뽑아 급제자 전원에게 통정대부를 주었다. 1769년에는 좌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명관(命官)이 되어 문과에 윤득성(尹得聖) 등 5인을 뽑고 무과에 김태상(金泰尙) 등 47인을 뽑았다. 1772년에는 문과에 신광수(申光洙) 등 6인을, 무과에 김세창(金世昌) 등 626명을 뽑았다. 또, 1776년에는 문과에 강세황(姜世滉) 등 2인을, 무과에 진순기(陳順起) 등 46명을을 뽑았다. 철종 대인 1854년에는 문과에 서응순(徐應順) 등 6인, 무과에 심휘태(沈徽泰) 등 844인을 뽑았다.
고종 때는 기로 응제(耆老應製)라는 명칭으로 유생을 대상으로만 실시하였다. 우수자에게는 직부전시 이하의 은사를 내리고, 당일이나 며칠 후 이내에 직부전시자는 '대과 급제자'로 알렸고, 감시, 회시 방말자는 '소과 입격자'로 알렸다. 1877년(고종 14) 9월 15일의 기로 응제에서는 서정훈(徐鼎勳) 등 3인을 직부전시, 그 이하의 7명에게 감시, 회시 방말, 즉 진사의 은사를 내리고, 그 이하 5명은 돈녕부 도정의 벼슬을 내리고, 그 이하 5명은 오위장으로 제수한 후, 9월 20일에 대과와 소과의 방방(放榜)을 행했다. 1888년(고종 25)에 2월의 기로 응제와 1890년(고종 27)의 3월의 기로 응제 역시 응제 후 방방이 동일하게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