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록별집 ()

기묘록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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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문헌
조선전기 기묘사화와 관련된 봉사문(封事文)을 수록한 정치서.
정의
조선전기 기묘사화와 관련된 봉사문(封事文)을 수록한 정치서.
서지적 사항

저자 미상.

내용

기묘사화와 관련된 기록으로는 김정국(金正國)의 ≪기묘당적 己卯黨籍≫, 안로(安璐)의 ≪기묘록보유 己卯錄補遺≫, 김육(金堉)의 ≪기묘록 己卯錄≫(일명 己卯諸賢傳), 저자 미상의 ≪기묘록속집 己卯錄續集≫, 안방준(安邦俊)의 ≪기묘유적 己卯遺蹟≫ 등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른 기록과는 달리 제현봉사(諸賢封事)라 하여 6편의 봉사문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6편의 소장(訴章:상소한 글)은 기묘사림파(己卯士林派)에 속하는 인물들이 기묘사화 직전에 올렸던 것들이다.

그 내용은 첫째, 1517년(중종 12) 김식(金湜)이 짓고 이충건(李忠楗)과 연명(連名)으로 제출한 것으로, 폐비 신씨를 복위시켜야 한다는 봉사문이다.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愼氏)는 연산군 때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인데, 중종반정 후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의해 폐출되었다. 이에 사림파는 신씨의 복위를 주장해 명분을 회복하면서 공신세력을 견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이 봉사문이 제출되었다.

둘째, 1517년 한충(韓忠)이 지평직을 사임하면서 당시의 폐단을 임금에게 상소한 것이다. 내용은 사임의 이유를 먼저 말하고, 농촌의 피폐한 상황을 개진(開陳)한 뒤, 그 이유가 조정의 정치가 정도(正道)로 나가지 않은 데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한충은 훈구대신(勳舊大臣)의 작폐를 비난하면서 성리학적 통치질서 수립을 요청하고 있다.

셋째, 1518년(중종 13) 조광조(趙光祖)가 홍문관부제학으로 재직하면서 도교적 사전기관(祀典機關)인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자는 주장을 상소한 것이다.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소격서가 이단(異端)과 괴설(怪說)에 근거한 기관이므로 ≪주자가례≫에 의거한 사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이 역시 당시 사림파가 추진했던 개혁정치의 한 갈래로서 구제(舊制)의 혁파를 통해 ‘지치(至治:왕도정치를 지칭함)’를 실현하려던 그들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넷째, 1519년(중종 14) 대사간 이성동(李成童) 이하 사림파 계열 사간원 관원의 상소이다. 당시의 각종 천재지변과 그에 따른 민생의 어려움을 말하고, 이러한 문제점은 임금이 중정인의(中正仁義)의 도를 지킬 때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 역시 개혁정치의 한 갈래인 현철군주론(賢哲君主論)을 실현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다섯째, 1539년(중종 34) 이약빙(李若氷)이 중종에게 폐첩 박씨와 그 아들을 죽임이 부당함을 논한 상소로서 역시 성리학적 명분에 입각해 있다. 여섯째, 1517년 생원 권전(權碘)이 짓고 성균관 학생이 연명으로 올린 것으로 정몽주를 공자묘에 같이 배향하자는 주장이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이 ≪기묘록별집≫에 실린 6편의 상소문은 모두 개혁정치를 주장한 사림파의 현실에 대한 의식을 파악할 수 있어 그 자료적 가치가 높다. 현재 ≪대동야승 大東野乘≫ 권11에 ≪기묘록속집≫과 함께 수록되어 있어, 같은 인물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참고문헌

『조선전기 기호사림파 연구』(이병휴, 일조각, 1983)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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