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장악원주부, 예조좌랑, 군자감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항쟁한 의병.
이칭
백형(伯亨)
오천(鰲川)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43년(중종 38)
사망 연도
1621년(광해군 13)
본관
울산(蔚山)
주요 관직
군자감정
관련 사건
임진왜란|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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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중기에, 장악원주부, 예조좌랑, 군자감정 등을 역임하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항쟁한 의병.
개설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백형(伯亨), 호는 오천(鰲川). 아버지는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김응정(金應井)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로 주부(主簿) 조숙견(趙淑堅)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유년 시절에 큰아버지인 김응두(金應斗)에게 『효경(孝經)』·『소학(小學)』 등을 배운 뒤 족형(族兄)인 김인후(金麟厚)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기효간(奇孝諫)·정운용(鄭雲龍)·변이중(邊以中) 등과 학문을 강론(講論)하였다.

건릉참봉(健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내섬시봉사(內贍寺奉事)에 제수되었는데,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사직했다가 삼년상을 치른 뒤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가 되었다. 1591년(선조 24) 정철(鄭澈)의 천거로 예조좌랑(禮曹佐郎)에 임명되었으나, 정철이 강계(江界)로 유배를 당하자 두문불출하였다.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김신남(金信男) 및 두 아들 김극후(金克厚)·김극순(金克純)과 기효간·윤진(尹軫) 등과 함께 장성(長城)의 남문(南門)에서 도내(道內)에 격문(檄文)을 띄워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다시 의병을 모집해 크게 활약하였다. 이듬해에 그 공로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승진하였다.

1601년에는 영의정 윤승훈(尹承勳)이 충의(忠義)를 조정에 천명했으며, 공조참판·의금부동지사·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자 조정에서 여러 차례 상을 내렸다. 죽은 뒤에 회계사(晦溪祠)·오산사(鰲山祠) 등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오천집(鰲川集)』 2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오천집(鰲川集)』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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