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노봉(老峰).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못하고 있다가 무신들이 정권다툼을 치열하게 벌이던 명종 때에 용만(龍灣: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의 좌장(佐將)을 거쳐 한림(翰林)이 되었으며,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장가로서 특히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시대에 핍박받는 농민들의 모습을 친근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또한 농촌문제를 자신의 일로 고민했던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문인들이 김극기의 시를 평하여 “문장의 표현이 맑고 활달하며 말이 많을수록 내용이 풍부하다.”고 하였으며, 이인로(李仁老)는 김극기의 문집 『김거사집(金居士集)』의 서에서 “참으로 난새나 봉황 같은 인물이었다.”고 하여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고고한 행적을 찬양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귀구감』에 의하면 김극기의 문집은 135권 또는 15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고, 『동문선(東文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시가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