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이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랑(古陁炤娘)이다. 이찬(伊飡)으로 대야성군주(大耶城軍主)가 되었다. 642년 8월 백제장군 윤충(允忠)이 군사 1만인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여 왔다.
그런데 대야성에서는 이전에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겨 불만을 품고 있던 검일(黔日)이 그 한을 풀기 위하여 백제군과 내응하여 창고에 불을 질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에 김품석은 보좌관인 서천(西川)을 파견하여 항복하기를 자청하였다.
이때 또다른 보좌관인 죽죽(竹竹)이 백제의 흉계를 역설하며 만류하였으나, 김품석은 듣지 않고 성문을 열어 군사들을 성밖으로 나가게 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백제측 복병(伏兵)에 의하여 모두 죽음을 당하였으며, 이 소식을 듣고 김품석은 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윤충은 김품석과 그 처자들을 모두 죽인 다음, 그 목을 베어 왕도인 사비성(四沘城)으로 보내고 남녀 1000여인을 사로잡아갔다. 김품석 내외의 유골은 압량주군주(押梁州都督) 김유신(金庾信)이 생포한 백제장군 8인과 교환되어 647년(진덕여왕 1)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