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서(金弘敍, 1886~1956)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1907년 조직된 신민회의 연락원으로 활약하였고, 1911년 105인사건이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1915년 경찰에 붙잡혀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16년 초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적십자회와 상해대한교민단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만든 임시사료편찬회의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를 탈피하기 위해 조직한 시사책진회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결성한 한국노병회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조달하는 공성단 대표로 참여하여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관여하면서 1935년까지 잠깐의 사임 기간을 제외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유지하였다. 1931년에 조직된 한인애국단 세력과 한국독립당 세력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자, 1935년에 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상하이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말 임시의정원으로부터 의원 해임 통지를 받았다. 이후 난징〔南京〕으로 이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앙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194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追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