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서 ()

근대사
인물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6년
사망 연도
1956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주요 경력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대표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68)
관련 사건
105인사건
내용 요약

김홍서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으로 시작해 1930년대 중반까지 여러 차례 의원직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으나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하였다.

정의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인적사항

김홍서(金弘敍, 1886~1956)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이다.

주요 활동

1907년 조직된 신민회의 연락원으로 활약하였고, 1911년 105인사건이 일어나자 피신하였다. 1915년 경찰에 붙잡혀 4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1916년 초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의 평안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 참사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결성된 대한적십자회상해대한교민단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 한일관계사료집』을 발간하기 위해 만든 임시사료편찬회의 간사를 맡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침체를 탈피하기 위해 조직한 시사책진회와 독립군 양성을 위해 결성한 한국노병회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조달하는 공성단 대표로 참여하여 개조파의 입장에 섰다.

1930년에는 한국독립당 창당에 관여하면서 1935년까지 잠깐의 사임 기간을 제외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유지하였다. 1931년에 조직된 한인애국단 세력과 한국독립당 세력의 갈등이 점차 깊어지자, 1935년에 창당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상하이지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그해 말 임시의정원으로부터 의원 해임 통지를 받았다. 이후 난징〔南京〕으로 이주하여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중앙집행위원, 중앙위원 등을 역임하며 1940년대까지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주1되었다.

참고문헌

기타 자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1~7, 31~37, 별책1·5·6(국사편찬위원회, 2005, 2006, 2008~2011)
주석
주1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 따위를 줌. 우리나라의 경우 긴급 상황에서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하다가 사망하거나 위급한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여 사회 전체의 본받을 만한 모범이 된 사람, 생전에 큰 공을 세워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덕망을 갖춘 사람에게 준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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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김정인(춘천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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