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형 돌기둥 사면에 돌아가며 새겨진 네 구의 부조 불상으로 공덕산(사불산)의 해발 약 600m의 바위 언덕에 있다. 돌기둥은 대략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는데, 남·북면에는 입상이 새겨져 있고, 동·서면은 좌상일 가능성도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정확한 판독이 어렵다.
동쪽 불상이 그중에서 상태가 가장 양호한 편이다. 세부적인 표현을 보면 육계는 뾰족하게 솟은 편이고 귀가 유난히 크다. 목이 두껍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전체적으로 양감이 풍부하게 표현된 불상이었던 것 같은데, 박락된 부분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얼굴의 이목구비는 남아 있지 않지만, 윤곽은 달걀형의 갸름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당한 어깨선은 백제 때 조성한 태안 마애불의 어깨를 연상시킨다. 수인(手印)은 아마도 오른손을 들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결하고, 왼손은 결가부좌한 두 발의 위에 얹어놓지 않았을까 한다. 상체의 좌우로 넓게 펼쳐진 것은 소맷자락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통견의 착의를 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상체 아래로 길게 파손된 부분이 보이는데, 이것이 입상의 다리 부분을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좌상의 상현좌 부분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두 갈래로 갈라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른 면에 새겨진 불상들도 소매 아래에 좌우로 펼쳐진 옷자락이 강조되어 있는데, 소위 삼국시대 불상의 ‘물고기 지느러미형 옷자락’을 표현하였다. 남쪽 불입상은 하의 자락이 넓고 날카롭게 펼쳐져 있다. 그 아래로는 두 다리가 표현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었다는 것은 하의가 짧고 그 아래로 종아리 부분이 어느 정도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역시 삼국시대 불상의 특징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 ‘사불산·굴불산·만불산’조에는 “죽령 동쪽 백 리 가량 되는 곳의 높이 솟은 산에 진평왕 9년 갑신, 문득 사면 1장이나 되는 큰 돌이 나타났는데, 사방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대승사 사방불상을 바로 이와 연관된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위 기사에 관해서는 몇 가지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우선 진평왕 9년인 587년은 갑신년이 아니라 정미년이며 이와 가까운 갑신년은 624년에 해당하기에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점, 또한 현재 불상의 위치는 죽령에서 동쪽으로 100리가 아니라 서쪽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점, 아울러 출현한 돌의 크기도 현재 불상이 새겨진 돌기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혼동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삼국유사』에서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고, 기사에 등장하는 사불산을 현재의 사방불상이 있는 곳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대승사 사방불상의 제작 시기와 관련해서는 백제 때 조성한 예산 화전리 사면 석불의 사례도 참고될 수 있다. 이 불상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서쪽의 아미타불, 동쪽의 약사불, 북쪽의 미륵불, 남쪽의 석가불이라는 사방불의 개념보다는 방위의 개념 없이 그저 네 면에 불상을 새긴 사면불로 이해되고 있다. 따라서 대승사 사방불상이 사방불의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인 삼국시대에 조성되었을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방불을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삼국유사』에 관련된 기록이 있어 불상의 조성배경이나 당대의 인식 등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독특한 도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 사방불상 제작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