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漕倉)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稅穀)을 개경(開京)으로 운반하였다. 덕흥창(德興倉)은 충청도 충주 일원과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모았다가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충주 덕흥창은 본래 여수포(麗水浦, 前號 金遷浦)라고 불리던 곳에 설치되었다. 여수포는 992년(성종 11)에 수경가(輸京價)가 설정될 때 6석에 1석을 지급하던 곳이었다. 덕흥창의 위치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부근의 남한강과 달천이 합류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창동리 일대에는 창골이라는 지명과 함께 충주 창동리 오층석탑과 충주 창동리 마애여래상, 충주 창동리 석조 약사여래 입상 등이 지금도 남아 있어 옛 덕흥창의 흔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고려 정종(靖宗) 때(재위 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漕運船)의 숫자를 정하면서, 덕흥창에는 1척당 2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 20척을 두었다고 한다. 덕흥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충주와 그 관할 지역, 경주와 상주, 안동, 그리고 경산부(京山府: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의 관할 지역 등이었다. 덕흥창에 모인 세곡은 한강을 따라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되었다. 고려시대의 조창은 단순히 창고 건물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지역까지 포함하는 일종의 행정 구역이었다. 조창에는 세곡의 운송과 보관을 감독하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었으며, 실무 행정을 담당하는 색리(色吏), 세곡의 보관과 운송을 담당하는 사공(沙工), 격군(格軍) 등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고려 인종(仁宗) 때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지리서인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충주 읍치(邑治) 서쪽 10리의 연천(淵川)에 경상도의 공부(貢賦)를 거두어 들이는 조창인 경원창(慶原倉)이 있고, 그 북쪽에 덕흥창이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조선 세종(世宗) 때(1418~1450)까지도 덕흥창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1403년(태종 3)에는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충주에 모아 한강 수운으로 운송할 것을 결정하면서, 덕흥창 옆에 경원창을 신설하였다. 경원창은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별도로 보관하는 조창으로 설립된 것이었다. 덕흥창과 경원창은 서로 인접한 지점에 위치했던 관계로, 두 조창은 하나의 조창으로도 인식되었으며, 두 조창을 합쳐서 금천(金遷), 금천창(金遷倉), 연천(淵遷) 등으로도 불렀다.
『태종실록(太宗實錄)』이나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덕흥창이 덕은창(德恩倉)이라는 명칭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1465년(세조 11) 충주 가흥역 동쪽 2리 지점에 가흥창(可興倉)을 신설하고 덕흥창과 경원창의 기능을 가흥창으로 이전하였다. 덕흥창과 경원창은 이때 모두 폐지되었다.
고려시대 충주 남한 강변에 설치되어 운영된 덕흥창은 충주 일원뿐만 아니라 경상도 여러 지역의 세곡이 모이는 조창이었다. 따라서 고려시대 13조창 중 가장 넓은 수세 구역을 지닌,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조창에 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