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4판. 20면. 1922년 9월 3일 편집 겸 발행인에 진학문(秦學文), 감집(監輯)에 최남선(崔南善)으로 하여 창간되었으며, 신문관(新文館)에서 발행하였다.
제호는 고구려의 동명왕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되며, 이는 동방이 밝아온다는 뜻으로 겨레의 밝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1면을 표지로 사용하였는데, 제호 아래 계명성(鷄鳴聲)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다시 그 좌하단에 해인사의 대장경 판목고(板木庫) 등 세계 각국의 명화와 국립기념비 등의 사진을 곁들였다.
이 책은 “조선민족아 일치(一致)합시다. 민족적 자조(民族的自助)에 일치합시다.”라는 구호를 편집목표로 내걸었다. 편집위원으로는 염상섭(廉想涉)·권상로(權相老)·이유근(李有根)·현진건(玄鎭健) 등이 활약하였다.
창간호는 2만 부를 발행하여 충분히 소화시켰는데, 권두논문으로 <조선민시론 朝鮮民是論>을 비롯하여 권덕규(權悳奎)의 <조선어문의 연원과 그 성립>, 설태희(薛泰熙)의 <조선은 오직 조선인의 조선>, 최린(崔麟)의 <공생활과 사생활>, 최남선의 <조선역사 통속잡화> 등의 서명 기고를 실었다.
특히, <조선민시론>은 이음글로서 창간호부터 연재되어 2·3·4·7·9·10·11·12·13호 등에 걸쳐 한국민족의 대동일치를 호소, 강조하였다. 제1회 논설에는 김동성(金東成)의 시사만화까지 게재하였다.
이 책은 호를 거듭할수록 최남선의 개인적인 명망과 다채로운 편집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또, 처음부터 <신문지법 新聞紙法>에 의한 허가를 얻어내었기 때문에 일간신문과는 달리 각종 당면한 시사문제를 심층적으로 보도하고 논평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 니가타현(新潟縣)에서 일어난 한국인 노무자의 학살사건의 상세한 보도라든가, <인민을 위한 경관인가 경관을 위한 인민인가>라는 제목의 폭로기사, ‘동명평단’과 같은 단평란 등이 그것이다. 문예작품도 게재하여 양백화(梁白華)의 <빨래하는 처녀>, 염상섭의 <E선생> 등 연재소설을 실었고, 여성을 위한 가정개량에 관한 글도 실었다.
또, 애란(愛蘭) 민족운동이라든가 토마스 커컵의 <사회주의 요령> 등도 소개하였다. 그 뒤 1923년 6월 3일, 시대에 좀더 대응하고자 한다는 사고(社告)를 내고 일간신문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제3권 23호(통권 40호)를 마지막으로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