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효(朴泳孝)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8월에 설치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조선은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여러가지 부국책을 추진하였는데, 박문국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명칭은 유길준(兪吉濬)이 마련한 <한성부신문국장정 漢城府新聞局章程>의 제1조를 답습한 것이다. 초대총재는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는 김만식(金晩植)이었다. 기자는 동문학과 각 사(司)에서 차출된 주사(主事) 또는 사사(司事)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한성순보(漢城旬報)』는 한성부에서 주관, 발행하기로 하였으나, 박영효가 한성판윤을 물러남으로써 동문학으로 이관되어 1883년 10월 이 곳에서 발간하였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불타버리자 이듬해 중부 경행방(慶幸坊) 교동의 전 왕실건물로 이전,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복간되었다. 이 때 총재는 김윤식(金允植), 부총재는 정헌시(鄭憲時), 주필은 장박(張博), 회계는 정병하(鄭秉夏), 외국어 번역원에는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였다.
신문발행경비는 특수한 세수권(稅收權)을 부여받아 충당되었고, 각 지방관아에 배부되어 그 수익금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관세를 차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1888년 7월 재정문제로 통리교섭통상아문에 부속됨으로써 문을 닫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