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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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고종 20) 인쇄 · 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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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883년(고종 20) 인쇄 · 출판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내용

박영효(朴泳孝)의 건의에 따라 같은 해 8월에 설치되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직후 조선은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여러가지 부국책을 추진하였는데, 박문국은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산하기관인 동문학(同文學)의 신문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명칭은 유길준(兪吉濬)이 마련한 <한성부신문국장정 漢城府新聞局章程>의 제1조를 답습한 것이다. 초대총재는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는 김만식(金晩植)이었다. 기자는 동문학과 각 사(司)에서 차출된 주사(主事) 또는 사사(司事)의 직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한성부 남부 훈도방(薰陶坊) 저동의 영희전(永禧殿) 자리에 있었으며, 처음 『한성순보(漢城旬報)』는 한성부에서 주관, 발행하기로 하였으나, 박영효가 한성판윤을 물러남으로써 동문학으로 이관되어 1883년 10월 이 곳에서 발간하였다.

그러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으로 불타버리자 이듬해 중부 경행방(慶幸坊) 교동의 전 왕실건물로 이전, 『한성주보(漢城周報)』로 복간되었다. 이 때 총재는 김윤식(金允植), 부총재는 정헌시(鄭憲時), 주필은 장박(張博), 회계는 정병하(鄭秉夏), 외국어 번역원에는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郎)였다.

신문발행경비는 특수한 세수권(稅收權)을 부여받아 충당되었고, 각 지방관아에 배부되어 그 수익금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수금이 제대로 되지 않아 관세를 차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1888년 7월 재정문제로 통리교섭통상아문에 부속됨으로써 문을 닫고 말았다.

참고문헌

『통리아문일기(統理衙門日記)』
『통리교섭통상아문장정 속장정(統理交涉通商衙門章程 續章程)』
『저사집역(苧社輯譯)』
『한국신문사론고』(최준, 일조각, 1976)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에 대한 일고찰」(이광린, 『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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