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준시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현직 문무관료 등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중시의 일종.
내용 요약

등준시(登俊試)는 1466년(세조 12)과 1774년(영조 50)에 현직 문무 관료 등을 대상으로 특별히 실시했던 중시(重試)의 일종이다. 합격자에게는 중시의 예에 따라 홍패(紅牌)를 수여하고 특별 승진을 시키거나 품계를 올려 주었다. 이는 특별 시험으로 단 두 차례만 시행되었다.

정의
조선시대, 현직 문무관료 등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중시의 일종.
개념

조선에서는 1417년(태종 7년)부터 10년마다 한차례씩 문무 당하관을 대상으로 중시(重試)를 시행하여 급제자에게 특별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였다. 문무의 자질을 지속적으로 연마하도록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이외에도 왕명으로 관료들을 시험하여 급제자들을 특별 승진시킨 사례들이 있었다. 이때는 발영시(拔英試), 등준시(登俊試), 진현시(進賢試), 탁영시(擢英試) 등과 같이 특별한 명칭을 붙였다. 정례적인 중시는 문무당하관을 대상으로 시행한 데 비하여 특별 중시는 그때그때 응시 자격을 따로 정했다.

세조대 등준시

세조는 1466년(세조 12) 5월 단오절을 맞아 문무관을 대상으로 발영시(拔英試)를 시행하여 문과에서는 김수온(金守溫) 포함 40명, 무과에서는 금휘(琴徽)를 비롯한 43인을 선발하였다.

같은 해 7월 세조는 공조판서 구종직(丘從直) 등을 불러 주1주5에 대한 이야기로 직접 책제(策題)를 낸 후 종실, 문신과 자원자들을 모아 대책문을 짓게 하였다. 이에 모두 30여 명이 글을 지었는데, 그중에서 김수온(金守溫)을 비롯하여 12명을 선발하였다. 이 시험을 등준시(登俊試)라고 한다. 이 때는 특별히 종친에게도 응시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종친인 영순군(永順君) 부(溥)도 합격자에 들었다. 이어 같은 해 9월에 무과 등준시를 실시하여 최적(崔適)과 종친인 구성군(龜城君) 준(浚) 등 51명을 선발하였다. 이 시험의 합격자에게는 중시의 예에 따라 홍패(紅牌)를 수여하고 주6를 올려 주었다.

세조대 발영시와 등준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취약했던 세조가 자신을 지지하는 관료와 종친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친화책의 일환으로 시행되었다.

영조대 등준시

세조대의 등준시는 하나의 전례가 되어 영조대에 다시 시행되었다. 1774년(영조 50) 영조는 81세를 맞아 연초에 주2과 경복궁의 옛터를 방문하였는데, 이날 세조대의 고사에 따라 등준시를 시행하였다. 시험은 1월 15일 경복궁 주3주4에서 시행되었는데, 종1품부터 정3품 당상관까지 응시하게 하였다. 문과에서는 조덕성(趙德城)를 비롯한 15인, 무과에서는 이춘기(李春琦) 포함 18명을 선발하였다. 1774년의 등준시는 노년의 영조가 선왕의 업적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시행한 시험으로 신료들에 대한 포상의 성격이 강했다.

참고문헌

원전

『세조실록(世祖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국조방목(國朝榜目)』

논문

김창현, 「조선 초기 중시에 관한 연구 -문과 중시를 중심으로-」(『국사관논총』 80, 國史編纂委員會, 1998)
원창애, 「조선시대 문과 중시 급제자 연구」)『역사와 실학』 39, 역사실학회, 2009)
주석
주1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천지자연의 네 가지 덕. 원(元), 형(亨), 이(利), 정(貞)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2

조선 태조와 그 비(妃)인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위패를 모신 사당. 우리말샘

주3

경복궁 안에 있는 정전(正殿). 조선 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 따위를 거행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에 대원군이 다시 지은 것이다. 우리나라 국보이다. 우리말샘

주4

예전에 집 따위가 있었거나 사건이 일어났던 곳. 우리말샘

주5

사람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 가지 마음. ≪맹자≫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仁)에서 우러나오는 측은지심, 의(義)에서 우러나오는 수오지심, 예(禮)에서 우러나오는 사양지심, 지(智)에서 우러나오는 시비지심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6

여러 벼슬자리에 대하여 매기던 등급. 제일 높은 정일품에서 제일 낮은 종구품까지 18단계로 나뉘어 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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