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성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수보(遂甫)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723년(경종 3)
사망 연도
미상
본관
임천(林川)
주요 관직
대사헌
정의
조선 후기에, 승지, 대사간,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수보(遂甫). 인천부사 조현기(趙顯期)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조정서(趙正緖)이고, 아버지는 문헌공(文憲公) 조명리(趙明履)이며, 어머니는 홍우석(洪禹錫)의 딸이다. 부인은 교리를 지낸 이존중(李存中)의 딸이다. 조명진(趙明震)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63년(영조 39) 증광문과에서 뽑힌 53인 중 장원을 하여 영조가 손수 지은 사언(四言) 한 구(句)가 하사되었다. 그뒤 삼가현령(三嘉縣令)으로 파견되었다가 곧 승지로 발탁되었고, 1764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영조의 뜻을 거스린 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였다.

그 뒤 1766년 승지에, 이듬해에는 대사간에 다시 제수되었다가 1768년 좌승지로 옮겨 익릉(翼陵) 기신제(忌辰祭)의 공으로 호피(虎皮)가 하사되었다. 1772년(영조 48) 대사간으로 재직 중 구상(具庠)을 탄핵하는 소를 올려 삭직당하였다가 복직하였다.

이듬해 승지·대사간을 거쳐 1774년에는 등준과(登俊科)에 뽑혔고, 창방(唱榜)에 장원하여 우윤(右尹)으로 승진한 뒤 이듬해 대사헌에 올랐으나 숙배(肅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진도군(珍島郡)에 찬배(竄配)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정조가 즉위한 뒤 벽파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윤양후(尹養厚) 등과 일을 도모했다는 이유로 삭출(削黜)되었다가 1782년(정조 6)에 사면되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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