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로화(禿魯花)’로 표기한다. 몽고는 그들의 정복 지역에 대해 호구조사 실시, 역참(驛站) 설치, 조정군(助征軍) 파견, 양곡 제공, 다루가치(達魯花赤) 설치 등과 함께 인질 제공을 강요하였다. 따라서 이를 통해 광대한 정복 지역을 통제하였다.
고려에 대해서도 전쟁기간 중 줄곧 이 여섯 가지를 요구해 왔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그 가운데 인질 제공만을 받아들여 1241년(고종 28) 처음으로 왕족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과 귀족 자제 10인을 몽고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과 송빈(宋玢) · 설공검(薛公儉) · 김서(金㥠) 등 귀족 자제 20인을 새로이 파견하였다. 이들은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한 직후에 귀국해 숙위군인 홀치(忽赤)에 충원되었다.
일반적으로 귀족자제들은 여기에 선발되어 원(元)에 파견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1275년(충렬왕 1)에는 여기에 선발된 사람들에게 특별히 3등급을 올려 수직(授職)하고 대방공(帶方公) 왕징(王澂)과 함께 원에 보냈다. 하지만, 이들 중 몇 명은 원에 들어가 유력자들에게 청탁해 곧 귀국한 경우도 있었다.
1278년 충렬왕이 원에 친조(親朝)해 다루가치의 폐지와 원병의 철수, 홍다구(洪茶丘) 소환 등을 요구해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서 원은 고려에 대한 간접적인 통제의 수단으로 인질을 더욱 요구하게 되었고, 그 자격 조건도 더욱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음 해에는 김방경(金方慶) · 원부(元傅) · 박항(朴恒) · 허공(許珙) · 홍자번(洪子藩) · 한강(韓康) · 설공검 · 이존비(李尊庇) · 김주정(金周鼎) 등 고위관직자의 자제들이 망라되어 대방공 징과 함께 원에 보내졌다.
이들 가운데는 안향(安珦) · 박전지(朴全之)처럼 원에서 문명(文名)을 떨친 사람도 있었고, 한사기(韓謝奇)의 경우처럼 가족을 이끌고 원에 들어가 그 자손들이 그 곳에서 출사(出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곧 귀국했으므로 성장기를 원에서 보낸 이들을 통해 몽고의 풍습이 고려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1282년과 1284년, 1301년에도 파견된 적이 있다. 1313년(충선왕 5) 충숙왕이 즉위한 직후에 왕족 왕고(王暠)가 원에 있으면서 이에 충당된 것을 끝으로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려와 원의 관계가 안정되어 가면서 원에서 굳이 이의 파견을 종용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고려의 국왕들이 즉위하기 이전에 반드시 원에서 생활했으므로 인질을 통한 원의 고려에 대한 통제가 완화되었다고는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