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초명은 이인성(李仁成), 자는 지정(持正)이다. 부인은 좌복야 한림학사(左僕射翰林學士) 이주(李湊)의 딸이며, 아들은 이우(李瑀)·이정행(李精行)·이숙(李璹)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白文節)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1260년(원종 1) 9월 과거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호부(戶部)·병부(兵部)·이부(吏部)의 시랑을 역임하였다. 1275년(충렬 1) 4월 상서우승으로 국자시의 관장하였으며, 예빈경을 거쳐 좌승지에 올랐으며, 김주정(金周鼎), 박항(朴恒) 등과 함께 필도치(必闍赤: 政序의 서기직)의 일원이 되었다.
1279년 7월 밀직부사로서 장군 정인경(鄭仁卿)과 함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사행하였으며, 12월 동지밀직사사, 이듬해 12월 지밀직사사·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1282년 11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서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1284년 9월 감찰대부(監察大夫), 1287년에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의 도순문사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는데, 제반조치가 적의하여 민원을 사지 않았다.
1287년(충렬 13) 정월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로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에 대하여 특히 세자가 울면서 심히 애석해하였다고 한다. 묘지명이 현재 전하며 회당화상(晦堂和尙)에게 보낸 칠언율시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