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이 25.0㎝. 호림박물관 소장. 용뉴(龍鈕 : 종의 꼭지부분 장식)는 13세기에 제작된 일반적인 종들처럼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벌어진 입안으로는 보주(寶珠)가 표현되지 않았다. 용뉴 뒤에 붙은 짧은 음통(音筒)은 아무런 장식이 없이 간략화되어 의미없는 장식물로 전락되었음을 볼 수 있다.
천판(天板) 외연에는 사각의 연판과 내부에 화문장식이 첨가된 입상화문대(立狀花文帶)가 높다랗게 솟아 있고, 이와 붙은 상대(上帶)에는 띄엄띄엄 배치된 화문과 그 사이를 당초문으로 연결시켰다.
이와 달리 하대(下帶)는 화문 없는 연당초문(蓮唐草文)으로 장식하고, 그 하단부에 다시 1줄의 연주문(連珠文)이 첨가되었다. 상대 아래 붙은 사각의 연곽대(蓮廓帶)에는 간략한 당초문으로 장식하고 내부에 간략화된 9개씩의 작은 종유(鐘乳)를 조밀하게 배치하였다.
한편 종신의 앞뒤 두 곳에는 구름 위에 앉아 합장한 모습의 보살상을 장식하였다. 이들은 그다지 섬세하지 못하고 세부표현이 분명치 않지만, 머리 위에는 삼각형의 보관을 쓰고 두광(頭光)을 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보살상 사이를 번갈아 가며 원권(圓圈) 없이 연과(蓮顆)와 8엽의 연판문으로 장식된 당좌(撞座)를 앞뒤 두 곳에 배치하였는데, 이 역시 그 본래의 구실보다 장식적인 의미가 더욱 강해졌음을 느낄 수 있다.
종신의 한쪽 여백면을 택해 7행 40여자의 오목새김명문을 기록하였다. 자획이 불규칙하여 판독되지 않는 글자가 일부 보이지만 그 내용은 다음과같다.
‘公州地修(?)淵院□於小鐘同心慶元大明□之等如願成就之信入重六斤 匠人朗□戊寅十月 日(공주지수(?)연원□어소종동심경원대명□지등여원성취지신입중6근 장인랑□무인10월 일)’로서 공주의 수(?)연원이라는 곳에서 6근의 중량을 들여 무인년 10월에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무인년은 1218년과 1278년 가운데 용뉴와 음통의 간략화와 도식화된 세부문양 등으로 미루어 1278년(충렬왕 4)의 제작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