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한경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공부상서, 추밀원부사, 우복야 등을 역임한 무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226년(고종 13)
본관
명주(溟洲)
주요 관직
공부상서|추밀원부사|우복야
관련 사건
거란유민 침입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고려후기 공부상서, 추밀원부사, 우복야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명주(溟州). 우복야(右僕射) 문유보(文儒寶)의 손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처음에 대정(隊正)에 보임되었다가 이후 대장군이 되었는데, 1215년(고종 2)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파견되어 북계지역(北界地域)의 방수(防戍) 임무를 맡았는데 사졸들에게 상을 주면서 많은 뇌물을 받았으며, 주군(州郡)에 대한 착취 또한 심하여 원성이 높았다.

이듬해 거란의 유민들이 쳐들어오자 인근지역 군사를 지휘하여, 위주성(渭州城) 밖에서 적을 대파하는 공을 세웠다. 1217년 11월 거란이 다시 고주(高州)·화주(和州) 등 동계지역(東界地域)으로 쳐들어오자 상장군으로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되어 대장군 유돈식(柳敦植)·기윤위(奇允偉) 등과 함께 출정하였다.

적들이 동계로 마구 쳐들어왔는데도, 의주(宜州)에 병력을 모아놓고 체류하며 싸우지 않고 온갖 장인(匠人)을 모아 군영(軍營) 안에서 사물(私物)을 만들게 하며 사소한 이익[錐刀]까지 탐하다가, 적의 포위를 당하여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패배를 자초하였다. 이로 인하여 섬에 유배되었으나 얼마 뒤 다시 복직되어 병부와 공부의 상서를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우복야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