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6폭으로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렸으며, 각 폭의 크기는 세로 39.6㎝, 가로 60.1㎝이다. 그 중 세 폭의 상단에 조선 초기의 화원(畵員)으로 기록되어 있는 최숙창(崔淑昌), 서문보(徐文寶), 이장손(李長孫)의 이름이 적혀 있다. 조선 초기의 작품이 매우 드문 상황에서 중요한 연구 자료이다.
‘미가산수(米家山水)’는 북송대의 문인 서화가였던 미불(米芾)과 그의 아들 미우인(米友仁)의 산수화 전통을 지칭한다. 평원으로 전개되는 나지막한 토산(土山)을 배경으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 양자강 하류의 풍경을 그린 강남 산수화의 전형으로서 ‘운산도(雲山圖)’ 혹은 ‘청산백운도(靑山白雲圖)’, ‘우경산수화(雨景山水畵)’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산의 표면이 짧은 횡점인 미점(米點)으로 묘사되고 키가 작은 활엽수인 무근수(無根樹)가 그려지는 점이 특색이다.
우리나라에 미가산수가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문헌기록에 운산도 혹은 청산백운도 등에 부친 찬시(讚詩)가 다수 실려 있어 고려시대에 이미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마토분가관에 소장된 6폭의 산수화는 미가산수의 전통을 잇고 있다. 산등성이를 드문드문 이어 주는 굵은 선묘(線描 : 선으로만 그림)와 괴량감 있게 표현한 산의 묘사법은 고극공(高克恭)으로 대표되는 원대 이후의 미가(米家) 양식 화풍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한 강남의 운산도에서는 볼 수 없는 침엽수와 바위 표면에 적용한 소부벽준(小斧碧皴 : 도끼로 찍어낸 자국을 연상시키는 표현법)도 동시에 보여 절충적인 경향을 드러낸다.
문헌기록을 통해 세 명의 화가, 즉 최숙창·서문보·이장손은 15세기 후반기에 활동했던 화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장손과 최숙창은 성현의 『용재총화(慵齊叢話)』에 4명의 작가들과 함께 언급되었고 이식(李湜)의 『사우정집(四雨亭集)』에는 서문보의 산수화를 찬한 5언절구가 실려 있다. 이외에도 『성종실록(成宗實錄)』등 관련 기록이 남아있지만, 현존 작품이 없어 야마토분가관의 산수화를 고증할 수 있는 시각적인 자료가 불충분한 실정이다. 3명 중 유일하게 이장손은 1467년에 조성한 낙산사 범종의 보살상과 1474년에 정희대왕대비가 시주해 제작한 목판사경(木版寫經)의 화사(畵師)로 기록되어 있어 그의 활동연대와 역할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6폭의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는 3인의 화원 이름이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 사람의 손으로 그린 듯이 명문의 필치와 화풍이 유사하다. 이는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화원으로서 각자의 개성을 발휘하기보다 당시의 보편적인 회화 양식을 답습한 결과로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원래는 연속된 한 화가의 작품이거나 혹은 공동 작업으로 제작한 것이었는데, 후에 현재와 같은 크기로 분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