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죽산(竹山). 아버지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낸 박덕룡(朴德龍)이다.
일찍이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한 뒤 대간(臺諫)과 대언(代言)을 역임하였다.
우왕(禑王)이 즉위하자 고려는 명나라와의 친교를 단절하고 원나라와의 친교를 재개하였는데 이인임(李仁任)은 이에 반대하는 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박형 등이 자기를 해치려 했다는 구실로 모두 귀양보냈다.
1379년(우왕 5) 밀직사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겸임하였고, 1382년에는 왕이 절급도감(折給都監)을 설치하자 판개성(判開城)으로 별좌(別坐)가 되어 토지를 분급(分給)하였다.
1388년 최영(崔瑩) 등이 조반(趙胖)의 옥사(獄事)를 기화로 이인임·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을 축출할 때 임견미의 족당(族黨)으로 박형의 아들 밀직제학(密直提學) 박중용(朴仲容)이 연루되어 처형당하자, 박형은 각산(角山: 지금의 경남 사천)으로 귀양 보내 수자리(戍)를 살게 했다. 조선 초에 예문춘추관대학사가 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정강(靖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