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원정 ()

유교
인물
조선 후기에, 삼례찰방,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이정(而淨)
지족와(知足窩)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93년(선조 26)
사망 연도
1652년(효종 3)
본관
남양(南陽)
출생지
전라북도 남원시
주요 관직
삼례찰방|성균관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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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삼례찰방, 성균관전적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이정(而淨), 호는 지족와(知足窩). 아버지는 방덕화(房德驊)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南原楊氏) 부사(府使) 양홍손(楊洪孫)의 딸이다. 방원정은 왜란(倭亂) 중에 남원(南原)에서 유복자(遺腹子)로 출생하여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면서 오정길(吳廷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18년(광해군 10)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지들과 합세하여 각 읍에 격문을 발송하는 한편 의병과 군량을 모아 전주(全州)에 이르러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귀향하여 모았던 군량을 관아의 군비(軍費)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에도 형 방원진(房元震)과 재종형(再從兄) 방원량(房元亮)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에서 적을 대파하고 계속 진격하여 과천(果川)에 이르러 야간공격을 감행하여 적을 크게 무찌르고 노획물을 대량으로 거두었으나 곧이어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서 해산하였다.

그 후 1646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 해에 삼례찰방(參禮察訪)에 재직하면서 주민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한편 다방면에 걸친 민폐를 혁신시켰으며, 국가의 시장정책(市場政策)의 허점을 간파하고 원활한 시장경제를 통해 부국(富國)의 실효를 거둘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외교정책(外交政策)·흉년구제책(凶年救濟策)·유언비어(流言蜚語)·역술(曆術) 등을 포함한 다방면에 매우 깊은 식견을 지녔으며, 한때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재임하였다. 저서로는 『지족와집(知足窩集)』 2권 1책이 있다.

참고문헌

『국조방목(國朝榜目)』
『지족와집(知足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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