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사명 청동 은입사 향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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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
유물
고려시대의 향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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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의 향완.
내용

높이 27.8cm. 일본 나라현(奈良縣) 장곡사(長谷寺)에 소장되어 있던 것으로, 현재는 나라(奈良)국립박물관에 기탁, 보관되어 있다.

고배형(高杯形)의 일반적인 고려시대 은입사향완과 마찬가지로 노신(爐身)과 대부(臺部)를 2분하여 주조하였는데, 대부 정상의 돌기를 동체의 구멍에 끼워 결합시킨 뒤 그 주위를 3개의 작은 못[釘]으로 다시 고정시켰다.

바깥으로 벌어진 넓은 전을 지닌 동체는 거의 수직에 가깝게 밑으로 내려오다 하단부쪽에 한 줄의 융기선이 둘러지고 이 아래로 다시 2단의 굴곡을 이룬 고복형(鼓覆形)의 노신 받침을 만들었다. 전부의 상면을 돌아가며 4군데에 쌍구(雙鉤)의 연당초문(蓮唐草文)을 배치하였으며, 안으로 말린 구연부에도 16개의 운문이 장식되었다.

특히 이 노신의 고복형 받침 아랫단 부분을 돌아가며 마치 감입(嵌入)을 한 듯한 4개의 구리못이 돌출되어 있는데, 노신과 대부를 연결시키고자 보강한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노신 면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의 원권(圓圈)으로 둘러진 4개의 범자문(梵字文)을 중심으로 그 여백면에는 4조선으로 구성된 당초문을 새겼고, 융기선 아래의 2단 노신 받침부에는 각각 내부에 꽃술이 장식된 방형의 연판문과 쌍구의 당초문이 은입사되었다.

노신 아래로 굴곡을 이룬 2단의 고복형 대부 받침에도 각각 칠보문(七寶文)과 당초문을 은입사하였다. 밑으로 가면서 점차 벌어진 대부에는 상부쪽에 복련(覆蓮)으로 구성된 방형의 연판문, 하부쪽에는 만개한 연꽃을 중심으로 굴곡지게 배치된 연당초문을 화려하게 은입사하였다.

대부 받침과 연결되는 다리 끝부분에는 여의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베풀었고, 다시 1단의 몰딩(moulding : 테두리 장식)을 둔 뒤 3단의 대부 받침을 만들었다. 가장 넓게 처리된 상단 받침에는 연당초문, 중단에는 여의두문을 두르고 가장 아랫단 받침부에까지 운문을 띄엄띄엄 장식하는 등 향로 전체를 돌아가며 빠짐없이 장식문양을 배치하여 매우 화려하게 꾸미고 있다.

특히 향로의 바깥으로 벌어진 전 밑바닥을 돌아가며 ‘襄州上白雲寺 洛山觀音前善來納 辛卯十二月日(양주상백운사 낙산관음전선래납 신묘12월일)’이라는 오목새김 명문이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양주 상백운사 향완으로서 낙산의 관음 앞에 신묘년 12월에 시납되었다.”는 내용이지만, ‘양주상백운사’ 부분은 일부러 지운 흔적이 보인다.

양주(襄州)는 지금의 강원도 양양군(襄陽郡)에 해당되며, 1221년(고종 8년)에서 1257년까지와 1260년부터 1413년까지 그 명칭이 사용되었음을 《동국여지승람》 44권 〈양양도호부 襄陽都護府〉조를 통해 알 수 있다.

상백운사의 소재는 미상이지만 ‘낙산(洛山)’은 같은 책 산천(山川)조에 보이는 오봉산(五峯山)의 별칭으로서 의상대사가 창건한 낙산사(洛山寺)가 있던 장소이다. 따라서 이 향로는 낙산사 관음 앞에 시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정된 형태와 세밀한 문양 구조는 통도사(通度寺) 향완과 매우 유사하면서도 지정(至正:1341∼1367) 연간의 14세기 향완과 많은 차이점이 느껴진다. 따라서 그 신묘년은 연호(年號) 없이 간지(干支)만이 사용되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1231년과 1291년 중 1231년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한국 불교향로 연구」(이용진,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1)
집필자
최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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