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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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중 활래정 정측면
강릉 선교장 중 활래정 정측면
주생활
개념
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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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몸채의 곁이나 뒤에 따로 지은 집.
내용

주택에 부속된 별당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연장으로 가장(家長)의 다목적인 용도로 쓰여지거나, 자녀나 노모의 거처로 쓰여지기도 한다. 또 그 지역 사회에서 공공대화의 처소로 또는 사회적·경제적·문화적 중심으로서의 모든 구실을 담당하였던 곳이다.

이와 같이 별당은 접객(接客)·독서·한유(閑遊)·관상(觀賞) 등의 목적이 있었으므로 우리 건축의 정취(情趣)와 세부 구법(構法)의 정교함이 잘 나타나 있다. 현존하는 별당 건물들은 대개 조선 중기·후기의 것들이 남아 있어 동일시대의 건물인 관계로 시대적 차이를 알 수 없다.

또한, 그 당시에 유행하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받아 길지(吉地)를 택하였으므로, 건축기법 등의 지방적인 특징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건축주의 사회적 신분과 경력에 따르는 모든 지식 및 기호에 따라 약간씩의 차이가 나고 있다. 폐쇄 속에 개방성이 엿보이는 별당건물은 평면으로 보아 택지는 항상 이에 알맞은 경승지를 택하였다.

인공연당(人工蓮塘)과 축산(築山)으로 환경을 조성하였으며 연당이 없는 경우에도 별당은 주위 환경을 일단 돋보이게 하였다. 정면은 3칸 또는 4칸으로 하나, 측면의 크기는 대들보 부재의 크기에 따른 규제를 받게 되어 대개 17척(尺) 이하로 처리되므로 2칸 정도의 크기가 된다.

기단은 대부분 잡석으로 축성한 높은 기단으로 되었는데, 그 중 특히 높은 예는 강릉 해운정(海雲亭), 안동 임청각(臨淸閣) 정침(正寢)과 군자정(君子亭) 등이라 하겠다. 기둥은 일부 각주를 사용한 예도 있으나 거의 원주를 사용하였다. 대접받침 위 공포의 조작(造作 : 물건을 지어 만듦)은 익공계(翼工系) 중 초익공양식으로 된 것이 많아 간단하고 소박하게 처리한 느낌을 준다.

이는 기능상의 요구와 유학자들의 정신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세부 가구(架構)에 있어서도 포대공(包臺工)이나 동자기둥 형식이 많으며 화반(花盤 : 창방 위 중간에 얹어서 주심도리 밑 장여를 받는 받침)도 사다리꼴에 연속되는 당초무늬를 조각한 것이 많고 오량구조(五樑構造)가 일반적이다.

지붕의 형태도 팔작지붕이 다수이다. 높고 낮은 지붕처리의 변화라든가 합각지붕의 연속된 돌출 등은 전경을 관망하였을 때 더욱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여준다. 특히, 모든 목조건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기단과 기둥, 창살·처마곡선·지붕곡선 등 수직과 수평선의 교차 및 그들의 조화는 우리 나라만의 특징이라 하겠다.

현재 별당건물이 본채와 같이 병존하는 예는 강릉 선교장(船橋莊)과 활래정(活來亭), 안동 임청각 정침과 군자정, 달성 박황씨댁(朴熀氏宅)과 태고정(太古亭), 예천박씨 종가와 효자정 등을 들 수 있으며, 본채는 없고 별당만 독립되어 남아 있는 예는 회덕 동춘당(同春堂), 월성 무첨당(無忝堂), 영천 숭렬당(崇烈堂), 강릉 해운정, 안동 소호헌(蘇湖軒) 등을 들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건축양식론』(정인국, 일지사, 1980)
집필자
김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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