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왜선 100여척을 무찔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바다에서 연전연승한 이순신은 일본수군의 소굴로 되어 있는 부산포를 무찌르기 위하여 8월 24일 전라좌우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출전, 중도에서 원균(元均)으로 하여금 조선수군을 정돈하게 하였다.
이어 29일 낙동강하구를 거쳐 9월 1일 부산포로 향하던 중 화준구미(花樽龜尾)·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절영도(絶影島) 등지에서 적선 24척을 불태우고 부산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그 때 왜군은 선창 동편에 470여척이 줄지어 있었고, 병사들은 주로 언덕을 이용하여 대응할 태세를 보이고 있었다. 이어 이순신의 명령과 함께 160여척의 조선수군이 장사진으로 공격을 개시, 우부장(右部將)인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구선돌격장(龜船突擊將) 이언량(李彦良), 전부장(前部將) 이순신(李純信), 중위장(中衛將) 권준(權俊) 등 제장이 선봉에 서서 군사들을 독려하여 100여척을 불태우고 부수었다.
이 전투에서 조선수군의 피해는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하여 전사 6인, 부상자 25인이었으며, 전투 후 이순신은 가덕도에 이르러 3도 수군의 군진을 해체하고 그날로 귀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