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단지

녹유골호(부석제외함)
녹유골호(부석제외함)
선사문화
유물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容器).
이칭
이칭
장골용기, 골호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뼈단지는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容器)이다. 화장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장골(藏骨)이라고 하여 ‘장골용기’ 또는 ‘골호(骨壺)’라고도 한다. 처음에는 부장용 토기와 별차이가 없었는데 8세기경 화장뼈단지용으로 특별히 제작되었다. 점차 외용기가 커지고 모양은 둔중해지고 무늬는 쇠퇴하였다. 고려시대 이후 거의 소멸하고 대신 돌널에 화장인골을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일제시대 경주 일대에서 많이 수습되었으나 학술적인 조사를 하지 못하였다. 최근 부여 지역의 화장묘가 발굴되면서 화장에 대한 학술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정의
사람의 시체를 화장한 뒤 뼈를 추려 담아 땅에 매장할 때 사용하던 용기(容器).
개설

‘장골용기(藏骨容器)’ 또는 ‘골호(骨壺)’라고도 한다. 화장뼈를 땅에 매장하는 것은 장골, 그 무덤은 ‘화장묘’라고 하며, 화장뼈를 빻아 바닷물이나 산천에 뿌려 물고기나 조수에게 보시하고 무덤을 남기지 않는 경우는 산골(散骨)이라고 한다.

내용

우리나라의 화장풍습은 불교 전래 후 불교식 장례의 영향을 받아 보급된 것으로 여겨진다. 발생 시기는 문헌과 뼈단지에 부장된 화폐 등을 통해볼 때, 7세기 이후, 즉 삼국시대 말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화장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관혼상제가 행해지면서 불교식 화장은 쇠퇴되었다. 오늘날에는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으나 전통은 단절되고 산골만이 전해올 뿐이다.

화장뼈단지를 이루는 용기의 개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화장뼈를 직접 담는 내용기와 이 내용기를 넣은 외용기의 구성이 가장 기본적이다. 그러나 내용기 하나만을 사용하거나 외용기 안에 작은 내용기 3∼6개를 넣거나 뼈단지 2개를 상하로 포개놓은 경우도 있다. 내외용기의 재료는 같은 것도 있고 전혀 다른 것도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내외용기의 재료는 토제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내용기는 토제품이고 외용기는 석제품인 경우도 있으며, 드물지만 내용기를 중국의 삼채나 청자제품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백제의 화장뼈단지는 회백색을 띤 고온경질토기이며 항아리 형태가 가장 많고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고대 일본의 화장뼈단지 역시 백제계통과 비슷하다. 신라의 뼈단지는 고온경질토기로 화장뼈단지용으로 특별히 고안, 제작되었다. 초기 양식인 7세기경의 뼈단지는 삼국시대 말의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용 토기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바리 · 항아리 · 굽다리접시 등 대각이 낮고 투창이 자그맣게 뚫린 것으로 화장뼈단지용의 특징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러나 구형(球形)의 몸체에 작은 사각형 구멍을 내 화장뼈를 납입했을 것으로 짐작되고, 뚜껑꼭지모양이 3층탑이나 연꽃봉오리를 연상하게 해 불교적 색채를 띤 화장뼈단지로서의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도 있다. 무늬는 기하학적 무늬가 주류를 이루었다. 용기표면의 일부 부위에만 빗금문살무늬〔斜格子文〕 · 집사선삼각문(集斜線三角文) · 점홑원 · 겹원 등이 성글게 새겨져 있다.

중기 양식인 8세기경의 뼈단지는 화장뼈단지용으로 단지모양이 특별히 고안, 제작되었다. 모양은 매우 다양해 대형합(大形盒) · 소형합 · 항아리 · 사발 · 병 · 원통형 등이 있으며 초기 양식의 대각 · 투각은 없어진다. 뚜껑꼭지 역시 다양해 보주형(寶珠形) · 소호형(小壺形) · 환형(環形) · 산개형(傘蓋形) 등이 용기모양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늬는 용기표면 전면에 촘촘하게 압인한 것이 특징이다. 무늬모양은 달개무늬〔瓔珞文〕 · 수초엽실문(樹草葉實文) · 꽃무늬 · 새무늬 · 구름무늬 · 엇빗금점줄무늬 등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외용기의 뚜껑과 몸체 사방에 돌쩌귀와 같은 맺음고리를 붙여 뚜껑과 몸체의 상하를 철사 등으로 짜매어 내용기를 보호한 점은 화장뼈단지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후기 양식인 9, 10세기 초의 화장뼈단지는 외용기가 커지고 모양이 둔중해 무늬가 쇠퇴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려시대의 내용기는 자기계통이나 목제품을 사용하였고, 외용기는 조립식 6면 돌널〔石棺〕을 사용하였다. 또한 돌널에는 사신도 · 비천상 등을 선각해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그러나 뼈단지는 고려시대 이후 거의 소멸하고 대신 돌널에 화장인골을 매장하는 풍습으로 바뀌었다.

의의와 평가

화장뼈단지는 일제시대 경주일대에서 공사 중에 많이 수습되었으나 학술적 조사를 거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근 부여지역의 화장묘를 학술적으로 발굴함으로써 화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고려시대(高麗時代) 화장(火葬)에 대한 고찰(考察)」(정길자, 『부산사학(釜山史學)』7, 1983)
「신라장골용기연구(新羅藏骨容器硏究)」(정길자, 『한국고고학보(韓國考古學報)』8, 1980)
「백제(百濟)의 화장분묘(火葬墳墓)」(강인구, 『백제고분연구(百濟古墳硏究)』, 일지사, 1977)
「新羅火葬骨考」(齋藤忠, 『新羅文化論考』, 吉川弘文館,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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