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육촌 ()

고대사
지명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한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했던 6개의 촌락(村落).
이칭
이칭
서벌육촌(徐伐六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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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로육촌은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한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했던 6개의 촌락이다. 서벌6촌(徐伐六村)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알천양산촌·돌산고허촌·취산진지촌·무산대수촌·금산가리촌·명활산고야촌의 6개 촌이 있었다. 씨족적 취락으로서 6촌장이라는 족장 밑에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사회였다. 6촌이 변천하여 6부제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촌의 위치에 대해서는 경주와 경주평야 일대로 한정하는 견해와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으로 확대하는 견해가 있다.

정의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한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했던 6개의 촌락(村落).
개설

사로6촌(斯盧六村)은 서벌6촌(徐伐六村)이라고도 한다. 이들 6촌(六村)은 6촌장(六村長)에 의해 다스려졌다. 6촌장은 각기 천강신화(天降神話)를 소유하고, 이를 지배력의 기반으로 삼아 대대로 각자의 촌락을 다스린 사로 지역의 전통적 존장자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6개 촌이 있었으며, 32년(유리이사금 9)에 6부(六部)로 고쳤다고 한다.

자연환경

구체적으로 사로6촌의 위치를 주변 자연환경에 비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알천양산촌의 경우 경주로 보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 경주시내, 월성(月城) 부근, 경주 남쪽, 남산(南山) 서북쪽 등으로 약간 차이가 있다. 돌산고허촌의 경우,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대체로 상주로 보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견해에서는 남천(南川)의 서쪽이나, 서악동 일대로 보고 있다. 무산대수촌은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제천예천, 또는 의성과 제천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경주 일원으로 보는 경우, 모량리나 건천 일대로 파악한다. 취산진지촌은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성주 또는 영해, 울진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인왕리, 또는 조양동, 또는 월성과 황룡사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금산가리촌은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김천 · 성주로 보거나, 개령 · 성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견해에서는 소금강산 또는 명활산(明活山) 부근, 천북면 일대 등으로 본다. 명활산 고야촌은 경상북도 일원으로 보는 경우, 경주 · 영천 지역이나, 경산 · 영천 지역으로 보고, 경주 일대로 보는 경우, 명활산이나, 보문리 일대, 또는 황성리 일대로 보기도 한다.

형성 및 변천

사로6촌과 6부의 위치 비정, 상호 관계, 개편 시기 등에 대해서는 학설이 다양한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신라사회의 정치적 발전에 따라 6촌에서 6부로 개편되었으며, 위치는 경주와 경주평야 일대에 한정된다는 견해이다.

이는 사로6촌은 씨족적 취락으로서 각 촌은 족장 밑에 혈연과 지연으로 결합된 사회 조직이고, 6촌이 변천해 행정 구역으로 발전한 것이 6부인데, 6부제(六部制)가 실현된 때는 경주의 행정구역 명칭이 정해진 469년(자비마립간 12)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경주의 고분군(古墳群)이 6개의 씨족별 또는 촌별로 나누어진다는 고고학적인 조사로 보강되고 있다.

둘째는 6촌의 위치를 지금의 경상남 · 북도 일원으로 확대하여 비정하고, 각 촌의 지배층을 경주로 이주시켜 귀족화(貴族化)하는 과정에서 6부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사로6촌은 경상도 일원의 12촌이 2부 체제(二部體制, dual organization)로 편성되어 6개의 촌이 된 것이다. 즉, 알천양산촌은 김씨(金氏) 부족의 부락인 알천과 박씨(朴氏) 부족의 주거 지역인 양산촌으로 나누어져 2부 체제를 이루었으며, 경주에 있었다. 나머지 5개 촌도 2부 체제를 이루며 경상북도 일원에 있었다. 그런데 알천양산촌이 경주 밖의 10촌으로 구성된 2부 체제의 5개 촌을 정복한 다음 각 촌의 지배층을 귀족화해서 6부를 이루었으며, 그 시기는 488년(소지마립간 10)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삼국사기』『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는 견해이다. 6촌으로 구성된 사로국은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대(서기 24∼56)에 박(朴) · 석(昔) · 김(金)의 3씨족 연합 세력의 규모가 확대되고 6촌 통치능력이 강화되면서 6부를 편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6촌의 위치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일대이며, 각 촌의 크기는 지름이 약 10㎞ 정도였다고 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사로육촌(斯盧六村)의 위치문제와 수장(首長)의 성격」(권오영, 『신라문화(新羅文化)』14, 1997)
『신라육부체제연구(新羅六部體制硏究)』(전덕재, 일조각(一潮閣), 1996)
『신라국가형성사연구(新羅國家形成史硏究)』(이종욱, 일조각(一潮閣), 1982)
「추장사회시대(酋長社會時代)의 사로육촌(斯盧六村)」(이종욱, 『신라가야문화(新羅伽倻文化)』12, 1981)
「신라상고시대(新羅上古時代)의 육촌(六村)과 육부(六部)」(이종욱, 『진단학보(震檀學報)』49, 1980)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이병도, 박영사(博英社), 1976)
「사로육촌(斯盧六村)과 경주고분(慶州古墳)」(김원룡, 『역사학보(歷史學報)』70, 1976)
「삼한(三韓)의 국가형성(國家形成) 상(上)」(천관우, 『한국학보(韓國學報)』2, 1976)
「신라상대사회(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김철준, 『역사학보(歷史學報)』1·2,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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