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자경(子慶), 호는 용계(龍溪). 서응기(徐應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함(徐涵)이고, 아버지는 서사건(徐思建)이다.
1630년(인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서학교수가 되었다. 그 뒤 청나라에 대한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경성통판(京城通判)에 승진하였다. 1652년(효종 3) 예조정랑으로 있으면서, 귀인(貴人) 조씨(趙氏)의 옥사에 관계되어 유배된 그녀의 아들 이징(李澂)과 이숙(李潚)을 용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아들을 유배에서 풀 것을 주장하였다.
1656년 천안군수로 재직하던 중, 승지 유도삼(柳道三)이 왕의 동생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실수로 신하라고 자칭하였던 사실을 빌미로 인평대군의 처남 오정일(吳挺一)을 비롯하여 허적(許積)·원두표(元斗杓)·한전(韓戩)·윤세교(尹世喬) 등이 모역한다고 고발하였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심문을 받던 중 장살(杖殺)되었다. 뒤에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어 예조참의를 추증받고, 대구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향사되었다. 저서로는 『용계집(龍溪集)』이 있다.